분극하는 공상의 인과
~01. 익스페리먼트·팩터
TB: 스테이터스: 기록 설비의 기동이 완료되었습니다.
TB: 지휘관님. 연산 시퀀스 35회차 수정 후, 시뮬레이터의 환경 재현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평소에 사용하는 업무용 책상에 책장, 커튼, 카펫, 소파. 집무실은 이제 진짜라고 착각할 정도로 재현이 가능하게 됐다.
첫 실험 때의 지오메트릭 패턴과 비교하면 한참은 진보한 것이다.
시뮬레이션의 환경 재현――상상한 광경을 재구성하는 「구현화」의 정도를 TB에게 물어봤다.
TB: 오더를 확인했습니다. 지휘관님의 피드백을 기록합니다.
TB: 환경 시뮬레이션의 재현도는 34회차와 마찬가지로 분석 가능 대역의 59.43%입니다.
TB: 또한 수정 후 연산 시퀀스에서의 구현화는 지휘관님의 이미지 해석본과 집무실의 현장 데이터를 대조하여 재조립한 것이 포함됩니다.
유니온의 극비 연구시설――「별바다」.
이 시설에서는 사람이 상상하는 광경을 「구현화」하는 시뮬레이션 실험이 행해지고 있다.
TB: 이 환경은 지휘관님의 상상에 기반하는고로 데이터 재구성만으로는 구현할 수 없습니다.
→ 실험을 계속하자
→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볼게
TB: 오더를 확인했습니다. 멘탈 프레임, 제어 록 해제.
TB: 집무실에서 일하는 중인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현재 구현되고 있는 환경에 겹쳐 보십시오.
함선을 만들어낼 수 있는 멘탈 큐브는 사람의 생각을 구현할 수 있다, 라는 것이 통설이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큐브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 규명하지 못했다. 이러한 큐브나 함선에 관한 연구는 극비 프로젝트로도 취급되기 때문에 아직 많은 부분이 비밀에 잠겨 있다.
TB가 말을 걸어왔을 때는 솔직히 놀랐지만, 지금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듯한 이 「큐브 적성」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상상을 구현한 집무실 안에서, 아직 읽지 않은 보고서조차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익숙해졌다.
TB: 구현 결과가 관측되었습니다. 데이터를 검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상상하고, 큐브 기술을 통해 이 정신공간에 구현한 것을 동료들이 확인해주고 있다.
TB: 구현된 보고서는 어제 지휘관님이 열람하신 신문지의 내용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40.57% 가량의 내용은 아직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TB: 다음 실험 단계까지 노이즈의 발생 원인을 조사하는 것은 현재 불가능합니다.
조금씩이지만 연구가 진전되는 것을 보면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고 보면 멤피스가 이 「실험」에 대해 처음 설명해줬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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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피스: 어흠……. 뭐, “자각몽” 같은 거라고 하면 좀 이해하기 쉬우려나?
멤피스: 지휘관의 뇌파를 읽고, 이미지를 해석해서 데이터화 한 후에 그걸 지휘관에게 자각몽 같은 느낌으로 피드백 하는 거야.
멤피스: 그게 이 「리얼리티 렌즈」라는 설비의 기능이고, 이 연구 자체라고도 할 수 있어.
멤피스: 물론 모든 뇌파를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야. 정확하게는 “확실히 상상할 수 있는 것”만이야.
멤피스: 문득 떠오른 것까지 반영되면 노이즈가 낄 테고, 이상한 걸 구현해버리면 무서운 광경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멤피스: 그래서 안전을 위해 TB가 필터링을 해서, 보면 스트레스를 받거나 정신을 잃을 것들은 차단하고 있어.
멤피스: 뭐 어디까지나 「리얼리티 렌즈」의 연산 시퀀스 최적화를 위한 실험이니까, 긴장하지 말고 지시대로 협력해줬으면 좋겠어…….
멤피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모든 걸 차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부디 신중하게, 응.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줬으면 해.
멤피스: 모든 건 다음 실험 단계까지 필요한 거니까.
멤피스: 후우…. 대충 이 정도야. 당분간 잘 부탁해.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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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 질문: 함선 멤피스를 구현한 의도는 무엇입니까?
멤피스: …………….
………아차. 쓸데없는 생각을 해버렸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까지 좀 더 「리얼리티 렌즈」 사용법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다.
~02. 굴절하는 빛
유니온 극비연구기지 「별바다」 B-20 구역 임시 집무실. 현실 공간
책상 위에 과학연구부서에서 도착한 보고서가 펼쳐져 있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멤피스가 보고서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멤피스: “……지휘관과의 접촉 후, 시간 경과에 따른 특별계획함의 정신적 안정성 변화에 대해서.”
멤피스: “……용골의 특수성이 특별계획함의 특수성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는 이미 증명되었지만, 정신적 안정성과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확증을 얻지 못했다…….”
멤피스: “……특히 앵커리지의 인격에 대해서는 정신분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며, 용골을 구성하는 정보 요소에 일부 불규칙한 이산 패턴이 존재한다…….”
멤피스: “……정보 요소의 이산 현상은 다른 특별계획함에서도 관측되지만, 지휘관과의 접촉 후 시간 경과에 따라 용골을 보강하는 식으로 재구성되며 이러한 현상이 사라진다…….”
멤피스: “……그녀의 정체성과 타인 지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보 요소의 해석이 매우 중요하다…….”
멤피스: 이해하기 어려운 말뿐이라 미안하지만, 뭐 그런 견해도 있다는 거야.
멤피스: 좀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멤피스: 앵커리지가 너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용골의 특수성과 관련이 있는 걸지도 몰라. 애초에 너를 제대로 “지휘관”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특별계획함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용골――이들을 구성하는 정보 요소의 일부분에 관측 가능하지만 해독할 수는 없는 많은 양의 「정보 블록」이 나타난다.
「별바다」의 연구 목적 중 하나도 이러한 정보 블록의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그녀들의 멘탈이 안정화되면서 빠르게 병합되고 재구성된다.
하지만 앵커리지는 다르다. 안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여전히 이러한 이상 현상을 보이고 있다.
대체 이 이상 현상은 뭐고, 또 왜 앵커리지에게만 일어나는 거지?
→ 앵커리지는 위험한 상태인 거야?
멤피스: 딱히 그렇지는 않아. 연구 도중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나오는 건 일상다반사니까.
멤피스: 「별바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앵커리지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어.
멤피스: 여기 오는 길에도 확인해 봤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고 상태가 나빠 보이지도 않았어.
멤피스: 오히려 걔는 여기가 어떤 곳인지, 우리가 뭘 걱정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해.
→ 앵커리지가 걱정되네
멤피스: 별다른 이상은 없어. 매우 건강해.
멤피스: 「별바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앵커리지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어.
멤피스: 여기 오는 길에도 확인해 봤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고 상태가 나빠 보이지도 않았어.
후드에게 일어난 일도 있고 하니까, 아무 문제 없었으면 좋겠는데….
멤피스: 그러네. 애초에 걔는 여기가 어떤 곳인지, 우리가 뭘 걱정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해.
그렇다고 앵커리지를 내버려둘 수는 없다.
「별바다」에는 각종 설비가 충실하게 갖춰져 있고, TB와 동료들도 있다. 무언가를 연구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지식과 기술은 다른 진영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하지……?
「별바다」에서 본 수많은 실험을 떠올리며 지금의 상황과 대조해본다――
……………그래.
→ TB, 「리얼리티 렌즈」의 상태는 어떻지?
TB: 오더를 확인했습니다. 「리얼리티 렌즈」의 상태에 관한 정보를 분석 중입니다.
「리얼리티 렌즈」는 멘탈 큐브 기술에 힘입어 사람의 상상을 자각몽과 비슷한 형태로 구현할 수 있다.
만약 앵커리지의 이산 정보 요소를 한 지점에 모을 수 있다면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있다. 「리얼리티 렌즈」를 함선에 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것이 오히려 앵커리지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게 된다면 본말전도다.
TB: 제안: 지휘관님이 「리얼리티 렌즈」를 사용하여 앵커리지의 용골의 접속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TB: 주의: 해당 공정을 테스트한 적이 없기 때문에, 「별바다」에 있는 프로토타입으로 실행하려면 연산 시퀀스 조정이 필요합니다.
멤피스: 지휘관…… 너 설마…….
멤피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멤피스: TB가 방금 “테스트한 적이 없다”라고 말했잖아?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야.
멤피스: 큐브 적성이 있는 지휘관의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탓에 테스트에 진전이 없는 건 우리 잘못이긴 하지만….
멤피스: 아무리 봐도 성급하게 결정하기에는 힘든 내용이야. 나말고 다른 사람들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걸?
멤피스: 연산 시퀀스 쪽은 많이 개선되고는 있지만, 함선의 용골과 접속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만…….
멤피스의 말도 맞다. 만약 「리얼리티 렌즈」가 해석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아까의 보고서에서도 해당 내용에 제안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별다른 방안도 없고 시간도 무한하지 않다. 그렇다면――
「별바다」의 자원 실험의 연산 시퀀스 개선으로 돌려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예산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다고 동료들에게도 전달했다.
……「리얼리티 렌즈」 연구를 다음 단계로 진행하기 위해 가능한 수는 모두 쓸 수밖에.
멤피스: 지휘관이 그렇다면 이론은 없어.
멤피스: 하지만 지휘관의 백업이 있다고 해도 꽤 시간이 걸릴 거야. 멘탈 큐브에 관한 연구니까 말야.
멤피스: 그리고 결국 지휘관이 참여해야 하니까 우리만 빨리 진행할 수도 없고.
멤피스: 바쁜 건 알지만, 어떻게든 조정 좀 해줘.
물론이다. 동료를 위해서라면.
일단 상황이 정리되면 한번 앵커리지를 보러 가자.
멤피스: 후우…. 자, 다음 보고서야. 이번에는 유사 환경 구축 시뮬레이터에 관한 내용인데――
~03. 출발
50번에 달하는 연산 시퀀스 개선으로 인해 「리얼리티 렌즈」의 동작을 겨우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슬슬 연구의 다음 단계인 앵커리지의 용골에 있는 불안정한 정보 요소들의 정체를 살펴볼 차례다.
베스탈: 지휘관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베스탈: 「리얼리티 렌즈」로 함선의 인식에 접속하는 건 지금까지 실험된 바가 없어요.
베스탈: 그리고 일단 접속이 시작되면 지휘관님의 의식은 끝날 때까지 「꿈」속에 갇히게 될 거예요….
베스탈: 아무리 「별바다」의 설비가 뛰어나다고 해도, 고장이 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베스탈: 그리고 앵커리지의 「이상 현상」과 상호 작용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베스탈: 비상 사태 발생 시의 예비 계획을 마련해 놓기는 했지만 과연 대응할 수 있을지는….
베스탈: 전문가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계획에 반대해요.
멤피스: 나도 그래. 시기상조라고 할까, 좀 더 검증을 거듭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실행해도 되잖아?
동료들이 걱정하는 이유도 물론 알고 있다.
분명 연산 시퀀스는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지만, 단순히 시간만 투자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의 실험으로 「리얼리티 렌즈」에서 생길 수 있는 위험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리스크를 쉽게 제거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여차하면 몇 년은 족히 걸릴 조정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실행하는 것이 훨씬 낫다.
비스마르크의 예도 있듯이, 용골의 이상이 함선에 미치는 악영향은 미지수이며, 절대 경시할 수 없다.
무엇보다 나도 언제까지고 「별바다」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 할 수밖에 없어
→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어
멤피스: 그래? 뭐 어쩔 수 없네. 지금부터 「리얼리티 렌즈」의 최종 점검을 실시할게.
베스탈: 헬레나와 다른 사람들도 불러올게요. 예비 계획과 행동 절차를 재확인 해야겠어요.
베스탈: 긴급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반드시 지휘관님과 앵커리지의 안전을 지켜드릴게요…!
참으로 든든한 동료들이다.
~04. 자각몽
시야가 어둠에 가리웠다.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간 느낌이다.
「리얼리티 렌즈」 기동 전 특유의 감각은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이번 임무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조금 긴장된다.
TB: 지휘관님의 심박수 상승을 확인했습니다. 메디컬 서포트를 실행할까요?
모니터링 중인 TB가 걱정의 말을 건넸다. 벌써 생각이 몸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건가.
일단은 심호흡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자.
TB: 지휘관님의 심박수가 안정됨을 확인했습니다.
TB: 실험의 요지를 최종 확인합니다. 용골에 접속한 후, 우선은 구축된 모의 환경에서 앵커리지와 대화를 진행하십시오.
TB: 이후 TB의 안내에 따라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TB: 「리얼리티 렌즈」 기동 중, TB는 지휘관님과 앵커리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인 모니터링 및 통신을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리얼리티 렌즈」의 기동을 승인한다.
TB: 오더를 확인했습니다. 「리얼리티 렌즈」, 기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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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설비에서 순간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몸이 형언할 수 없는 무중력감에 휩싸였다.
혈혈단신으로 우주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끝없는 개방감과 무력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러나 외로움과 허탈함에 잠식될 틈도 없이 지금까지 인식한 공간이 급속도로 수렴되면서 하나의 점으로 의식이 집중되어간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것은――
「리얼리티 렌즈」 가상현실공간. 구성 요소: 지휘관의 상상 + 앵커리지의 용골 정보
정신을 차려 보니 노을이 환하게 비치는 교실의 교단에 서 있었다. 눈앞에는 수많은 책걸상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교단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그녀"가 엎드려 자고 있었다.
내가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유니온 소속 특별계획함 앵커지리는, 그곳에 있었다.
TB: 접속 완료. 검증 시퀀스 작동 중.
TB: 접속 스테이터스: 정상……리소스 영역: 확보 완료……오차 값: 극소.
TB: 통신 테스트를 시작합니다. 지휘관님, TB의 음성 통신이 정상적으로 수신되고 있습니까?
머릿속으로 TB에게 확인 사인을 보냈다. 일단 여기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TB: …피드백을 수신했습니다. 통신 스테이터스: 정상. 검증 시퀀스가 완료되었습니다.
TB: 플랜A로 접촉을 권장합니다.
→ 알겠어.
TB: 오더 확인했습니다. 지휘관님. 앵커리지를 깨우십시오. 그녀와 대화하면서 모의 환경의 위화감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TB: 그 사이에 TB는 용골 접속으로 수신한 정보로 모의 환경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대화를 통해 얻은 정보의 분석을 실시하겠습니다.
그래. 작전대로 가자.
TB: 오더 확인했습니다. "앵커리지에게 읽어줄 그림책"을 생성합니다.
교탁에 이전 실험에서 상상했던 몇 권의 책이 뚝 떨어졌다.
그 중 한 권을 들고 앵커리지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앵커리지: 선생님……?
앵커리지: 후아아아암…. 선생님…! 앵커리지, 기다렸어…!
앵커리지: 선생님……. 앵커리지를 만나러 왔어… 기뻐!
평소처럼 동화책을 읽어주자.
앵커리지: 동화…… 좋아!
앵커리지: 재밌어… 포근해…… 반짝반짝……. 앵커리지, 좋아해!
앵커리지: 책은…… 어려워……. 앵커리지, 잘 몰라….
동화는 무척 좋아하지만 책은 아직 읽지 못하는 것 같다.
좋아. "동화의 숲 모험기"로 할까.
――옛날 옛날, 어느 숲에 "시계 토끼"라고 불리는 토끼가 살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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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리지에게 훈훈한 이야기를 읽어줬다.
앵커리지: 마지막에, 재밌었어…! 앵커리지, 좋아!
앵커리지: 이야기 들려주는 선생님, 대단해…!
앵커리지: 대단한 선생님한테… 앵커리지가 주는, 선물!
앵커리지는 웃으며 책상 서랍에서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을 꺼냈다.
「리얼리티 렌즈」 재현의 정확도 때문인지 뭐가 그려져 있는지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처럼 보이는 윤곽이 몇 개 있었다.
그림을 보는 순간 왠지 말하기 힘든 초조감을 느꼈다.
→ 이 그림은……
앵커리지: 앵커리지가 그린 그림, 선생님한테 줄게!
앵커리지: 선생님…… 맘에 들어…?
TB: 경고: 알 수 없는 데이터의 오버플로를 관측했습니다.
TB: 경고: 데이터 해석 기능의 처리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TB: 경고: 연산 시퀀스 가동 효율 저하 중.
TB: 접속 스테이터스: 불안정.
TB: 알 수 없는 데이터의 오버플로를 확인했습니다. 모의 환경의 유지 가능성 한계가 크게 저하되고 있습니다.
TB: 제안: 당장 실험을 중지하십시오.
조금만 더 버텨줘…!
…………
→ 그림에 있는 「사람」은 누구니…?
앵커리지: 앵커리지가 그린 사람…. 선생님하고… 선생님이 아는 사람…? 친구…?
앵커리지: 후우…… 하아암……. 앵커리지, 졸려…….
앵커리지: 꿈에서…… 재미있는 거… 선생님한테 알려줄게….
앵커리지도 교실도, 갑작스러운 눈부신 빛에 말 그대로 모두 지워졌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어간다――
~05. 기록
「리얼리티 렌즈」 가상현실공간. 구성 요소: 용골 정보 + ???
앵커리지? TB……?
……반응이 없다.
→ ………
몸은 움직일 수 있다. 「리얼리티 렌즈」는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주변이 하얗게 변한 것은 방금 오버플로 때문에 모의 환경을 구축할 수 없게 된 탓일까.
일단 주변을 확인해보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새하얀 공간에 있는 탓에 땅에 서 있는 건지 공중에 떠 있는 건지 판별하긴 어렵지만….
문득 「문」 옆에 앵커리지가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앵커리지: 선생님… 왔구나!
여기는……?
앵커리지: 앵커리지의… 으응, 「리얼리티 렌즈」의? 꿈? …저쪽에… 재밌는 이야기!
앵커리지: 선생님한테, 알려줄래!
…꿈? 앵커리지의 꿈? 「리얼리티 렌즈」의 꿈…?
아까 교실하고는 다른 건가…?
그리고 「리얼리티 렌즈」의 꿈이라니 무슨……?
………
→ 「문」 너머를 말하는 거니?
앵커리지: 응! 재밌는 이야기! 선생님!
앵커리지는 「문」을 가리키며 안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 앵커리지는 안 가는 거야……?
앵커리지: 앵커리지, 안 가…!
앵커리지: 선생님, 처음이니까… 선생님한테, 줄게!
아무래도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각오를 다지고 「문」을 통과했다.
손이 「문」에 닿는 순간 뇌 속으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드디어 용골의 『비밀』을 알아차린 모양이구나.”
“과거 내가 남겼던 기록과의 정합성은 1% 미만이지만 이 파장은 틀림없이 『너』야.”
“무엇보다 이 기록을 성공적으로 재생하고 있다는 게 바로 『너』라는 증거지.”
“그래. 내가 마지막에 박은 쐐기가 잘 작동하는구나.”
“알고 있어. 『네』가 언제,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그녀들을 내버려두진 않을 거라는 사실을.”
“『보험』을, 『네』게 맡기길 잘했어.”
…………방금 목소리는 뭐지…?
??: …………반응이 없네.
은은한 조명만이 비추는 방에 안경을 쓴 여성 같은 그림자가 보였다.
→ 당신은……?
→ 여기는……?
→ 대체……?
??: 너무 조급해 하지 마. 난 그냥 「기록」일 뿐이니까. 뭐… 정확히는 「기록」을 재생할 수 있는 AI라고 해야 하나?
??: 지금부터 찬찬히 설명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 우선 내 정체 말인데, 외모로만 따지자면 「안쥬(Anzeel)」라는 사람이야.
??: 그치만 나를 부를 땐 그냥 「리플레이어」라고 불러줘.
리플레이어: 그리고 여기는 데이터로 구축된 유사 공간.
리플레이어: 멘탈 큐브로 연결된 고차적 네트워크의 틈새에 있는 정보 요소로만 구성된 공간이야.
리플레이어: …라고 말해도 모르겠지. 그냥 누구한테도 탐지되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해.
리플레이어: 음― 예상보다 빨리 너한테 들키긴 했지만.
……들켜? 예상보다 빨랐다고?
리플레이어: 글쎄, 뭐랄까…. 「지금의 너」에게는 빨랐다, 라고 할까?
리플레이어: 네가 여기를 찾을 수 있었던 건… 이른바 스피드런? 버그를 사용한 부정행위?
리플레이어: 뭐 “랜덤 요소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냐”라고 안쥬가 그러긴 했었지.
리플레이어: 그러고 보면 앵커리지라는 애를 경유해서 여기 도착한 거지? 그 애는 무사해. 걱정 마.
리플레이어: 그 아이의… 「불안정한 패턴의 이산 데이터」도 그냥 걔가 좀 특이한 거지 딱히 어디가 잘못된 건 아니야.
리플레이어: 참고로 내가 너에게 알려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내」가 무얼 남겼느냐에 달렸지만.
리플레이어: 한번 보자고. 재생해야 될 기록은…… 으으음…… 핫!
리플레이어: ……실화냐…………우와아, 망했네….
리플레이어: 이곳에는 단편적인 감정 로그만 대량으로 있을 뿐, 재생할 가치가 있는 「정보」는 특별히 아무것도 없음! 데헷☆
→ …뭐?
→ …그래서?
리플레이어: 「리플레이어」를 배치한 건 그냥 안쥬가 널 보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라고 해야 되나?
리플레이어: 아니……너무 모호하고, 그렇게 단순한 이유는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리플레이어: 아니면… 네가 안쥬를 다시 한번 보고 싶어 해서 그런 걸까…?
리플레이어: 이 모습 자체가 안쥬가 전하고 싶었던 기록일 수도 있어.
리플레이어: “나를 기억해줘. 설령 네가 더 이상 네가 아니게 되더라도”――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리플레이어: 난 자세한 건 몰라. ……나는 단지 기록 재생용 AI니까.
…………반응이 없다.
→ 안쥬와 나는 어떤 관계였지?
리플레이어: 모르겠어. 기록에 없는걸.
리플레이어: 이렇게 대화하고 있지만, 결국 나는 좀 뛰어난 AI에 불과해.
리플레이어: 지시대로만 작동하는 프로그램하고 별반 다를 바 없어.
리플레이어: ……잠깐만. 뭔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리플레이어: 너 뭔가 씌었구나. 네 뒤를 따라왔나봐!
……TB?
그러고 보니 연결은 끊어지지 않았을 텐데 아까부터 TB는 계속 반응이 없었다.
여기가 “누구한테도 탐지되지 않는 곳”이기 떄문일까?
리플레이어: …………………….
리플레이어: 경고: V클래스 위협의 접근을 확인했습니다. 보안 프로토콜에 따라 AI 및 기록 제거를 실시합니다.
앵커리지: 선생님-!
앵커리지: 얼른… 여기서 도망치자…!
다시 불쑥 나타난 빛이 모든 것을 쓸어버리려 하고 있을 때, 어느새 가까이 있던 앵커리지가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얼른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강렬한 현기증이 엄습했다.
모든 뇌세포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의식이 급속히 몸 밖으로 끌려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앵커리지: 선생님…! 위험해…! 안 돼…!!
…………반응이 없다.
영혼은 다시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내던져졌다.
~06. 긴급사태
유니온 극비연구기지 「별바다」 X 구역 중앙제어실. 현실 공간.
TB: 경고: 「리얼리티 렌즈」에 알수 없는 데이터의 오버플로를 확인. 곧 배치된 메모리 용량을 초과합니다.
TB: 오버플로 위험성: 높음. 타임 레코그나이저 가동률, 80%로 저하.
멤피스: 말도 안 돼! 시작한지 10분밖에 안 됐는데? 대체 어디서 그 많은 데이터가….
멤피스: 설마 앵커리지의 용골 정보가 해석되고 있는 거야……?
TB: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데이터의 출처는 용골이라고 추론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TB: 예비 계획 F에 따라 「리얼리티 렌즈」에 연산 리소스와 메모리의 추가 배치를 시작합니다.
TB: 작업 시퀀스, 진행 중.
멤피스: 헬레나, 이대로는 지휘관이 위험해. 알 수 없는 데이터의 일부를 「별바다」의 다른 프로젝트로 옮겨!
헬레나: 응! 바로 시행할게…!
TB: 연산 리소스 및 메모리 추가 배치가 완료되었습니다.
TB: 경고: 「리얼리티 렌즈」에 알 수 없는 데이터의 오버플로를 확인. 30초 후 메모리 용량을 초과합니다.
멤피스: 또!?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멤피스: 실험할 때는 도시 전체를 시뮬레이션 하고도 남았던 자원인데, 이것마저 웃돈다는 거야…?
멤피스: 헬레나, 해석 쪽은 어때?
헬레나: 여기도 이제 무리야…! 처리 능력의 상한선을 넘었어…!
베스탈: 멤피스! 이대로 실험을 지속해선 안 돼요! 지휘관이 위험해요!
멤피스: 나도 알고 있어!
멤피스: TB! 모든 실험을 중지해! 「리얼리티 렌즈」와의 연결을 중단해!
TB: 지휘관님께 “조금만 더 버텨”라는 오더를 받았습니다. 처리 한계까지 실험을 계속합니다.
TB: 타임 레코그나이저, 가동률 25%로 저하. 「리얼리티 렌즈」 내에서의 시간 경과 속도 인식은 외부의 1/60이 됩니다.
멤피스: 그렇다는 건…… 여기는 1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베스탈: 지휘관님 쪽에서는 1시간이 지났을 거예요….
TB: 타임 레코그나이저 제어에 실패했습니다.
TB: 지휘관님의 바이탈 체크, 정보 모니터링, 음성 접속이 중단되었습니다.
TB: 예비 계획 F에 따라 「별바다」 우선순위 3 이하의 프로젝트를 일시 중지하고 리소스를 「리얼리티 렌즈」로 재배치합니다.
TB: 현시점의 데이터 오버플로 속도로 계산하면 약 90초의 가동 시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베스탈: 안 돼. 이 알 수 없는 데이터를 막아야만 해요!
베스탈: 이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안쪽의 시간 인식이 점점 늘어나서 결국 지휘관님의 뇌가 다 타버릴 거예요!
베스탈: …「별바다」를 긴급태세로 이행할 수밖에 없어요!
베스탈: 모든 자원을 「리얼리티 렌즈」로 돌리면 TB가 타임 레코그나이저를 다시 복구할 수 있을 거예요.
베스탈: 접속을 중단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호전되면 바로 두 사람을 구출하죠!
멤피스: …아무래도 다른 수가 없겠어. 지휘관과 새러토가가 준비해둔 최종 보험을 사용할 수밖에….
멤피스: 헬레나도 괜찮지?
헬레나: 아, 응!
멤피스: TB. 「별바다」를 긴급태세로 이행할 거야. 생명 유지와 보안 이외의 모든 자원을 돌려.
TB: 오더를 확인했습니다. 「탑」에 대한 액세스 코드를 입력하십시오.
멤피스: 0584. 멤피스, 승인.
헬레나: 7987. 헬레나, 승인…!
베스탈: 6982. 베스탈, 승인합니다! 지휘관님, 제발 무사하시길…!
TB: 액세스 코드 확인. 조작 권한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TB: 긴급 조작 권한을 확인했습니다. 제어 프로그램을 기동합니다.
TB: 긴급 오더 발령. 전 시스템, 크라이시스 모드로 이행합니다.
TB: 시설 내의 인원 대피를 개시합니다.
TB: 여기는 「별바다」의 제어 주기, 내비게이터 TB입니다.
TB: 크라이시스 대책 프로토콜 ECP-15 기동. 지금부터 「별바다」를 긴급태세로 이행합니다.
TB: 10분 후에 시설의 중심부를, 30분 후에 시설의 모든 구역을 폐쇄합니다.
TB: ……오더 취소 한계 시간 경과. 긴급태세 이행 절차는 중지될 수 없습니다.
TB: 시설 내 인원은 신속하게 지정된 대피 구역으로 이동하십시오.
TB: 반복합니다. 시설 내 인원은 신속하게 지정된 대피 구역으로――
멤피스: ……자, 여기부터가 진짜야….
멤피스: 지휘관 모니터링은 내가 할게. 베스탈은 앵커리지를 부탁해. 헬레나는 타임 레코그나이저를 맡아!
멤피스: 시간이 없어. 얼른 지휘관과 앵커리지를 구출해야 해!
~07.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눈
악몽을 꾸었다.
흐릿한 그림자가, 모습이, 존재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그 존재는 사라졌다――
의식이 느슨해지면, 그것은 다시 나타났다.
소리를 내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단지 서 있기만 하는 조각 같은 사람의 그림자.
경보음? …「별바다」 기지에 무슨 일이 있나…?
…아니. 아무래도 아직 꿈속인 것 같다. …아까와는 다른 꿈이다.
의식을 여기저기 돌려봤다. 조금 전까지 노려보던 존재는 없는 것 같다.
악몽에서 해방됐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주변에 경보음이 울리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
헬레나(META): 아직 안심하기는 일러, 지휘관.
헬레나(META): 지금은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적들이 다가오고 있어.
헬레나(META): 일어나. 지휘관. 얼른 일어나――――
……………….
헬레나: 다행이다…. 지휘관. 겨우 일어났구나.
헬레나: 아무리 깨워도 반응이 없어서, 멤피스를 부를까 생각했었어…….
어젯밤 실험 후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자다가 악몽을 꾼 것 같다.
헬레나에게 시간을 물어봤다.
헬레나: 그게, 시계로는 16시 16분이야.
오후 4시…? 그렇게나 잤다고…?
헬레나: 나도 위화감이 들어. 체감 시간으론 지금은 새벽 3시나 4시일 거야.
헬레나: 그런데 아까 「별바다」 기지의 모든 시계가 일제히 16시 16분으로 바뀌었어.
헬레나: 그리고 TB한테 거대한 「정체불명의 물체」가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
거대한 물체……? 「별바다」의 위치는 극비일 텐데…?
헬레나: 지금 기지 전체가 적색 경보로 상향되었어.
헬레나: 앞으로 30분이면 입구를 봉쇄하고 시설 전체를 은폐할 거야. 하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어.
헬레나: 다행히 아직 시간은 남았어. 25분 남았으니까 지휘관. 자, 같이 대피하자.
다른 함선들은 괜찮은 거야…?
헬레나: 외부에 있는 아이들은 이미 긴급 탈출했어. 시설 중심부에 있는 아이도 필요한 작업을 마치면 대피할 거야.
그렇다면… TB는――
헬레나: 응. 유감이지만 TB는……. 여기에 그 아이의 주기가 있으니까……….
헬레나: 시간이 없어. 지휘관, 얼른 가자.
………………
이상하다. 중요한 무언가를 잊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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