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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인기 투표 특별 스토리

킹루클린 2025. 12. 16. 23:16

● 젠하이
 ~01. 마음을 감싸는 차향
창밖에서 비추는 석양의 잔광이 나뭇가지를 통해 방에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남겼다. 나는 젠하이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마침 바둑판을 꺼내 놓고 있었다.

지휘관: 오늘도 바둑 두는 거야?

젠하이: 오늘의 바둑은 바둑판 위에 있지 않습니다.
젠하이: 차는 끓여야 제맛이 나고, 꽃은 만개해야 아름답죠.
젠하이: 차 향기와 녹음이 없다면 아무리 멋진 바둑판이라도 풍미가 떨어질 것입니다.

지휘관: 내가 일찍 왔나 보네. 준비하는 것 좀 도와줄까?

젠하이는 그저 빙긋 웃으며 찻잎 몇 가지를 꺼내 능숙하게 차를 끓였다.

젠하이: 마음에 드는 것으로 한 잔 골라 보세요.
젠하이: 이건 이른 봄에 딴 용정차인데, 처음에는 쓴맛이 나지만….
젠하이: 바둑은 차와 같아서 처음부터 승패를 가리기는 어렵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휘관: 음……. 뒷맛이 달고 좋네.

젠하이: 고진지후, 필유감래(苦盡之後, 必有甘來)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젠하이: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가 못 다한 말을 꿰뚫어 보시는군요.
젠하이: 그렇다면 이 한 잔이 '공격'인지 '수비'인지 구분하실 수 있겠습니까?


→ 공격이야
젠하이: 역시 당신께서는 능동적인 수를 좋아시는군요.
젠하이: 그러나 돌을 두기 전에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젠하이: '공격'이라는 단어는 너무 성급하여 차 본연의 맛을 해칠 수 있어요.

→ 수비야
젠하이: 맞습니다. 상황을 살피며 여유를 두는 것 또한 지혜이지요.
젠하이: 이러한 마음가짐이어야 결정적인 순간에 국면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젠하이: 이번 판은 지휘관님께서 선수를 차지한 것 같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젠하이는 이미 새 찻잎을 갈고, 손과 주전자를 씻고 물에 담갔다.

젠하이: 대국은 꼭 바둑판 위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휘관: 난 너하고 대국하는 게 좋아.

젠하이: 앗――

내 말에 감동을 받았는지 늘 꼼꼼하던 젠하이가 그만 손을 데고 말았다.

지휘관: 괜찮아? 아이스 팩 줄게.

젠하이: 괜찮습니다. 그냥 작은 부상입니다.

나는 젠하이의 손을 꼭 잡고 얼음찜질을 했다. 다행히 화상이 심하지 않아서 빨간 자국은 금방 사라졌다. 젠하이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

젠하이: ……두 가지 일에 몰두하다 보니 결국 한눈을 팔고 말았네요.
젠하이: 제가 상대를 얕봤군요.
젠하이: 아무래도 오늘 제 마음가짐은 더 이상 다도를 논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젠하이: 당신이 제 흐름에 말려들었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젠하이: 이제 이 국면을 장악해 보세요.

지휘관: 네가 아까 "차 향기와 녹음이 필요하다"고 그랬었는데…
지휘관: 지금 보면 이 방 안의 화초는 손질을 안 한 지 꽤 된 거 같은데?

젠하이: 좋은 제안이네요.
젠하이: 가지치기 역시 돌을 두는 것처럼, 손질도 적절하게 해야 하죠.

방에는 화초들이 많이 있었다. 한 그루 한 그루 모두 형태가 달랐으며, 가지와 잎이 무성했다. 분명 세심하게 보살핌을 받고 있을 터였다.

젠하이: 이 애기동백은 잎맥이 약간 노란 것을 보니 일조량이 부족한 것 같네요. 아쉽게도 아직 개화 시기가 아닙니다.
젠하이: 곁가지를 잘라내면, 어쩌면 더 일찍 꽃을 피울지도 모르겠군요.

우리는 각자 원예 가위를 하나씩 들고 화초를 다듬었다. 마음이 서서히 고요해지고, 식물과 함께하는 시간에 젖어들었다.

젠하이: 이 화초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제 오랜 친구입니다.
젠하이: 웬만한 사람보다 더 인내심이 많고, 과묵하죠.

지휘관: 응? 이건…… 담화(曇華)야?

젠하이: 네. 오늘 밤에 필 겁니다.

지휘관: 어떻게 확신해?

젠하이: 기보는 추론할 수 있고, 꽃이 피는 것 또한 유추할 수 있는 흔적이 있습니다.
젠하이: 믿지 못하시겠다면 한번 보시죠. 이번 대국에서 누가 이기고 지는지.

지휘관: 기대하고 있을게.


밤바람이 살랑 불었다. 우리는 잘라낸 가지와 잎을 정리한 뒤, 간식과 함께 차를 계속 마시며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젠하이: ……지휘관님? 지휘관님, 일어나세요.

지휘관: ……나 잤어?

흐릿한 시야 속에서 나는 젠하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에는 그녀의 부드럽게 내리깔린 눈썹이, 그리고 그녀의 뒤로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소리 없이 새하얗게 피어난 담화가 보였다.

젠하이: 꽃이 피는 순간은 놓치셨지만, 다행히도…….
젠하이: 꽃이 가장 활짝 핀 순간은 놓치지 않으셨네요.
젠하이: 한 번 둔 돌은 물릴 수 없죠. 이번 판은 제가 이겼습니다.

 

 

 

● 운젠
 ~02. 당신에게 얽매여
운젠: 지휘관님. 운젠과 함께 놀이공원에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호숫가 정자에서 쉬고 있던 중, 어느새 나타난 운젠이 갑자기 물었다.
산들바람이 그녀의 머리끝을 부드럽게 스치며 이슬에 젖은 진달래 향기를 실어 날랐다.
내가 못 들었을까봐 조마조마했는지 운젠은 다시 물었다.

운젠: 지휘관님. 운젠과 함께 놀이공원에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운젠: 입장권은 이미 마련해 놓았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운젠: 괜찮으시다면 운젠에게 지휘관님과 함께 유흥을 즐길 시간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지휘관: 괜찮긴 한데, 왜 놀이공원이야…?

운젠: 근래 운젠은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님께 '얽매이고 싶다'라는 마음은 몸과 수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운젠: 오히려 거기서 끝나게 된다면 지휘관님과 운젠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운젠: 일반적인 밀회로는 지금의 운젠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운젠: 제가 원하는 것은 아마도…… 당신과 함께 고동이 빨라지는 순간을 체험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운젠: 관람차가 정상에 올랐을 때 서로 겹쳐지는 입술…….
운젠: 혹은 자극이 가득한 롤러코스터에서 얽히는 손의 감촉…….
운젠: 그렇기에 운젠은 생각한 것입니다……. 놀이공원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밀회의 장소가 아닐까 하고.
운젠: 운젠은 아직 이 이치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운젠: 지휘관님과 함께 방문하면 필경 한두 가지는 밝혀낼 수 있겠지요.

운젠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투명한 호기심과 일말의 기대를 그 눈빛에 품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서, 농담이라는 기색은 추호도 보이지 않았다.

지휘관: 굳이 따지자면 운젠은 '얽매이는' 쪽보다는…… 자유롭고 마이페이스한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운젠: 후후후. 지휘관님의 말씀대로 운젠은 분명 자유를 좋아합니다.
운젠: 그러나 천지의 넓이를 알았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의 고귀함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운젠: 운유는 아름답지만, 목적을 잃으면 자유 또한 공허해질 수 있습니다.
운젠: 그저 목적의 이야기지만…… 그 너머에는 과연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운젠: 그 의문을 품고 운젠은 당신의 곁으로 온 것입니다……. 지휘관님. 운젠이 구하는 답은 있는 걸까요?


미소를 지은 운젠은 검지손가락으로 내 가슴팍을 톡 건드렸다.

운젠: 지휘관님. 사실 운젠은…… 꽤 제멋대로입니다.
운젠: 운유를 사랑한다고 말해 놓고는, 흔쾌히 받아주신 이 모항에 머무는 것을 택했습니다.
운젠: 저 흘러가는 구름을 보십시오. 자유로워 보여도 바람의 흐름을 따르고 있지요.
운젠: 운젠의 마음도 저 구름처럼, 이미 누군가에게 기대고 있는 것입니다.
운젠: 그 마음을 잃게 되면 아무리 멀리 여행을 해도 그저 배회하는 것과 다름없지요.
운젠: ……계속 흘러가는 것보다, 이곳――운젠이 머물 이 장소를 지키고 싶습니다.
운젠: 이 모항의 등불에는 운젠의 소중한 빛이 있습니다.
운젠: 제게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빛입니다.


→ 소중한 빛…?
지휘관: 소중한 빛…?

운젠: 후후후. 무엇일까요.

→ 운젠이 머물 장소란…
지휘관: 운젠이 머물 장소란…

운젠: 하늘 저편에 있으며…… 눈앞에도 있답니다.


운젠: 흐음……. 그렇군요.
운젠: 지휘관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운젠이 어떤 '얽매임'을 원하는지 드디어 감을 잡았습니다.
운젠: 네. 당신과 운젠만이 있는 세계. 지금 시야에 담긴 전부야말로…….
운젠: 운젠이 계속 구하던 것일까요.
운젠: 지휘관님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만…….
운젠: '밀회' 권유는 아직 유효합니다.
운젠: 놀이공원에 함께 가는 그날이… 운젠은 너무나도 기다려집니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운젠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내 손에는 놀이공원 티켓이 한 장 놓여 있었다.
손바닥에 남은 온기가, 방금 전 일은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 무사시
 ~03. 무사에게도 난심 있으니
두 자루의 장도가 교차하며 공간마저 흔들렸다.
일격이 끝나자마자 참격이 소나기처럼 덮쳤다. 나는 칼을 겨누며 이를 열심히 받아쳤다.

무사시: 역시 그대의 재주는 남다르군.
무사시: 비록 나의 공세가 더욱 맹렬해진다 하더라도 그대라면 전부 대처할 수 있을 테지.

대답할 새도 없이 새로운 공격이 날아들었다. 내 시선을 언뜻 본 것만으로도 무사시는 결론에 이르렀다.

무사시: 수련이란 자기 자신을 한계로 몰아 기술을 연마하는 것.
무사시: 허나 지휘관의 극한은 과연 어디인가? 참으로 흥미롭군.
무사시: 기술을 숨겨도 그대는 언제나 정확하게 간파한다.
무사시: 은밀히 보인 빈틈마저도 그대의 심안은 놓치지 않아.
무사시: 나와 오랫동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기에, 나의 움직임에 숙달된 탓인가…….
무사시: 아니면 그대의 숨겨진 소질은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물속의 빙산과도 같은 것인가….
무사시: 지휘관. 이번 수련은 더욱 본격적으로 진행해 보지 않겠느냐?

나는 무사시의 말에 흥미가 생겼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내 시선에 담긴 감정을 읽은 것 같았다.
무사시는 숨을 멈추고 정신을 집중했다. 일단 칼을 칼집에 넣자, 주변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분명히 힘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무사시: 그럼…… 받아 보거라!

발도한 칼끝에서 수행장이 울릴 정도의 기세가 솟구쳤다. 수천의 검기가 쏟아져 나왔다.
진동하는 소리, 흐트러진 기류에 부딪혀 곳곳에 걸려 있는 칼걸이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했다.

지휘관: 위험해!

무사시: ……!!

나는 생각보다 먼저 무사시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감쌌다.
무언가에 부딪혔다는 아픔 대신 무사시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무사시: 지휘관…….

지휘관: 무사시, 괜찮아?

무사시: 그래. 무사하단다.
무사시: 이제 괜찮아, 지휘관.

나를 다독이고 있지만, 무사시의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로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문득 방금 전 떨어졌던 물건이 그녀의 검기로 인해 양단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사시: 나에게 대처할 힘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져 나를 감쌌구나……. 이는 걱정으로 인한 난심인가?


→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야
지휘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야

무사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라……. 참으로 그대답군.

→ 못 본 체할 수는 없었으니까
지휘관: 위험을 보고 못 본 체할 수는 없었으니까

무사시: 나 역시 그대의 자상함이 그대를 상처입히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다.


무사시: 실은…… 방금 전의 '사고'는 내가 의도해서 꾸민 것이다.
무사시: 그대를 위험에 빠트리려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돌발 상황에서 그대의 판단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지….
무사시: 그대의 판단을 확인하면 나는 낙하물을 베어 사태를 수습할 생각이었다.
무사시: 허나 그대의 행동은 나의 상정을 뛰어넘었어……. 설마 곧바로 몸을 던져 나를 지키는 것을 택할 줄이야.
무사시: 검을 수련하는 것은 마음을 수련하는 것. 그대의 그 다정함을 인정하마.
무사시: 하지만…….

무사시는 가볍게 칼을 칼집에 넣고, 나를 꼭 껴안았다.

무사시: 자신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기거라……. 조금 더 자신을 소중히 하거라.
무사시: 그대가 다치면, 필시 그대를 위해 마음 아파할 사람도 있을 것이야.
무사시: 그러니 지휘관……. 더 이상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말거라.

나 역시 말없이 무사시를 껴안았다.
날을 부딪치던 칼이, 지금은 서로 조용히 기대고 있었다.


 

● 다이호
 ~04. 그 손으로 개봉해 주세요
해질녘. 일상 업무를 보고 있는데 마침 다이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다이호: 지휘관님! 왜 아직도 집무실로 돌아오지 않으시나요? 다이호가 선물을 준비했는걸요~
다이호: 얼른 돌아와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선물이…….

다이호의 전화는 거기서 끊기고 말았다. 살짝 미심쩍은 기분이 들어 집무실로 돌아와 문을 열자…….
눈에 들어온 것은 빨간 리본으로 묶인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상자였다.

지휘관: ……이게 다이호가 말한 선물인가?

내 말에 대답하는 것처럼 상자가 조금 움직였다. 리본을 풀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이호: 지휘관님께서 가장 기대하셨을 선물이어요~

지휘관: 다이호, 네가 선물이었구나.

다이호: 네에, 그렇답니다! '있는 그대로의 다이호'…. 지휘관님, 마음에 드시나요?
다이호: 이건 지휘관님 전용 선물이랍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어요~!
다이호: 으음, 그런데…….
다이호: 지휘관님. 조금만 더 다이호에게 가까이 와 주시겠어요? 조금만 더…….
다이호: 꺄악!?

지휘관: 위험하니까 도와줄까?

다이호: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지휘관님.
다이호: 직접 열어 주세요~

'선물' 포장지를 살짝 찢으려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테이프가 다이호의 몸에 붙어 버렸다.

다이호: 부디 조심하세요~ 무심코 다이호를 망가뜨려 버리면 변상을 요구할 거예요~

지휘관: 쉽지 않은데…….

다이호: 지휘관님을 위해 정성껏 준비했으니까요.
다이호: 지휘관님의 손으로 조금씩, 천천히…… 열어 주셨으면 하는 걸요~
다이호: 후후후. 어떠세요? 두근거리시나요?
다이호: 앗,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 위치에 있는 테이프는…….
다이호: 조금 꽉 붙어 있어서…… 히익!
다이호: 지휘관님, 긴장하셨나요? 후후. 부드럽게 해 주세요~
다이호: 다이호를 부드럽게 대하는 것쯤은…… 지휘관님께는 손쉬운 일이겠지요?
다이호: 그럼 발을 묶고 있는 리본도 풀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다이호는 다리를 살짝 내 쪽으로 옮겼다. 리본이 꽉 묶여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다이호: 지휘관님, 방금 표정… 조금 두근거렸답니다~
다이호: 마치 금단의 무언가를 열려고 하는 상황…….
다이호: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지 궁금해서 못 참으시겠죠?
다이호: 후후후. 가장 열기 어려운 것은 다이호의 마음이랍니다~
다이호: 그때가 되면… 지휘관님께서는 좀 더 밀착해서… 다이호를 많이 예뻐해 주셔야 해요♡

지휘관: 그건 상자에서 꺼낸 다음 이야기지.
지휘관: 얼마 안 남았어.

다이호: 네? 지휘관님은 정말로 손재주가 좋으시군요.
다이호: 생각보다 훨씬 빨리 풀렸네요……. 조금 아쉽지만, 빨리 직접 만져 주셨으면 좋겠기도 하고…….

마지막 리본을 조심스럽게 풀자, 비로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다이호는 천천히 일어섰다.

다이호: 지휘관님. 다이호, 다리가 저려서…… 더는 못 서있겠어요…….
다이호: 다이호를 안아 올려서 상자에서 꺼내 주시겠어요?

나는 시키는 대로 다이호를 안아서 상자에서 꺼냈다. 그러자 예상했다는 듯 그녀는 곧바로 내 목에 팔을 둘렀다.

다이호: 휴우. 드디어 나왔네요~
다이호: 후후. 지휘관님……. 지금의 다이호는 더 이상 '선물'이 아니랍니다.

지휘관: 그럼 뭔데?

다이호: 개봉 뒤에는 반품 불가. 지휘관님만의 다이호예요~


→ 소중하게 다룰게
다이호: 그럼 매일매일 정성껏 손질해 주고 예뻐해 주세요~

→ 특전 같은 건 없어?
다이호: 지휘관님은 욕심쟁이~ 좀처럼 만족을 모르신다니까요♪


다이호: 지휘관님~ 당신만의 다이호가 맘에 드는지 안 드는지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답니다?
다이호: 하지만 이제 와서 말씀하셔도 이미 늦었어요. 왜냐하면 다이호는 이미 알고 있는걸요♪

나는 다이호를 의자에 앉히려고 했지만, 목에 두른 팔에 그녀가 힘을 싣는 바람에 그대로 다이호의 품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다이호: 거리고 이렇게나 가깝고, 지휘관님께서 망설이신다고 해도 다이호는 더는 참을 수가 없답니다~
다이호: 지휘관님, 지금 무슨 기분이세요? 기쁘신가요? 감동하셨나요? 아니면…… 당장이라도 다이호를 예뻐해 주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으신가요?
다이호: 다이호는 뭐든 괜찮답니다.
다이호: 지휘관님께서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이호는 영원히 받아들이겠어요~


 

● 키어사지
 ~05. 특별 정비
키어사지: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일정에 따르면, 앞으로 며칠 동안은 중요한 작업이 없어. 즉 드물게 여유로운 시간이야.
키어사지: 그러니까 지휘관이 내일 내 데이터베이스와 장비 유지 보수를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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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항. 정비실

키어사지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유지 보수 단말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에너지 케이블이 은은한 형광빛과 함께 서서히 흐르기 시작했다.
정비실은 기기가 작동하는 희미한 웅웅거리는 소리와, 서로의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고요하지 그지없었다.

지휘관: (키어사지의 상태를 보니…… 유지 보수는 순조로운 것 같군. 금방 끝나겠어.)

키어사지: ……지휘관.
키어사지: 두 사람이 말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행위도… '데이트'라고 부를 수 있어?

지휘관: 둘 다 동의한다면 데이트가 아니라고 볼 이유도 없지…… 어?

그제야 나는 방금 키어사지가 내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어느새 케이블과의 연결을 해제하고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어사지: 지휘관. 유지 보수가 완료됐어.

지휘관: 으음. 내가 도와줄 게 있어?

키어사지: 응. 절차는 이미 익숙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는 바로 이럴 때 일어나.
키어사지: 만약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나를 대신해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지휘관밖에 없어.

그녀의 보라색 눈에 흐르던 데이터 빛이 점차 잦아들었다. 대신 그녀는 고요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평소 차분하고 이성적이던 눈빛에는 약간의 부드러운 미광이 비치고 있었다.

키어사지: 지휘관의 바이탈 신호가 상승하고 있어……. '데이트'에 대한 질문이 그렇게 의외였어?

지휘관: 그냥 생각을 잇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야. 그래서 나한테 유지 보수를 도와달라고 한 거야?

키어사지: 데이터베이스의 자료에 따르면, '공동 작업'은 친밀도를 높이는 가장 효과적이 방법 중 하나라고 해.
키어사지: 만약 우리가 방금 함께 보낸 시간을 '데이트'라고 상정한다면, 이에 맞춰 데이터베이스를 업데이트하고 동기화할 수 있어.
키어사지: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정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어.
키어사지: 그래도 답변을 이미 수집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갈게.
키어사지: 지휘관. 다른 일정 있어?
키어사지: 이렇게 연속적인 '데이트' 기회는 얻기 어려우니까, 더 많은 데이터를 기록하고 싶어.
키어사지: 만약 괜찮다면, 지휘관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든지 함께해 줄 수 있어.
키어사지: 하지만 그 전에 지휘관. 먼저 내 손을 잡아줘.


→ 이렇게 하는 것도 데이터 수집에 도움이 돼?
지휘관: 이렇게 하는 것도 데이터 수집에 도움이 돼?

키어사지: 아니. 이건 핑계일 뿐.
키어사지: 단지 지휘관이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 물론이지
지휘관: 물론이지.

키어사지: 접촉 회로 활성화, 확인. ……데이터 검증 중.


키어사지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맞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은 무언가를 탐사하듯 조금 더 강하게 내 손가락을 문질렀다.
그녀의 손바닥은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키어사지: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이렇게 하면 데이트 중 서로 간의 거리를 더욱 빨리 좁힐 수 있다고 해.
키어사지: 나에게는 전례 없는 새로운 경험이야.
키어사지: 원래 같았으면 일상적인 유지 보수였겠지만, 지휘관이 곁에 있으니까 즐거운 기분이 들어.
키어사지: 그렇군. 아마도 이것이 '데이트'의 진정한 의미겠지.

키어사지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키어사지: 지휘관. 바이탈 신호 모니터에서 수집한 데이터에 따르면 지휘관의 감정 변화가 충분히 강하지 않아.
키어사지: 데이터베이스 분석에 따르면 지휘관은 지금 이 순간 행복으로 인해 감정이 고조되어야 해.

키어사지는 이렇게 하면 더 많은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는 듯 내 손을 꽉 쥐었다.

키어사지: 걱정하지 마, 지휘관. 너는 내 유지 보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줬으니까,
키어사지: 이번에는 키어사지가 지휘관의 검사 및 유지 보수를 수행할게.

말하는 사이에 키어사지는 더욱 힘을 주어 내 손가락에 단단히 깍지를 끼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아무래도 오늘 이 '특별 정비'는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 앵커리지
 ~06. 바람에 새긴 약속
따스한 햇살, 바람이 잔잔한 어느 날.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모습이 깡충거리며 나를 맞이했다.

앵커리지: 선생님! 이쪽…… 이쪽!
앵커리지: 바람…… 좋아! 선생님… 앵커리지랑 같이 연날리기 하자! 응…!

앵커리지가 큰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었다.

지휘관: 이게 앵커리지가 준비한 연이니?

앵커리지: 응! 앵커리지가 만든 연! 엄청 엄청 커!
앵커리지: 직접 만들었어…!

앵커리지는 나를 넓은 잔디밭으로 이끌었다. 좌우를 둘러본 후, 앵커리지는 가방에서 그 거대한 수제 연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앵커리지: 연줄이…… 어라? 엉켜 버렸네?
앵커리지: 복잡해……. 앵커리지, 머리가 빙글빙글…….

지휘관: 줄이 꼬였네. 내가 도와줄게.

앵커리지: 선생님, 대단해……!
앵커리지: 선생님이랑 같이, 매듭 풀어도 돼……?
앵커리지: 헤헤……. 선생님 손, 따뜻해…….

지휘관: 이제 됐다. 마침 바람도 부는데 한번 날려 볼까?

앵커리지: 응! 선생님, 연, 봐봐!

연을 펼치자 앵커리지가 직접 그린 그림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휘관: 이건…… 나랑 앵커리지야?

앵커리지: 응! 선생님이랑… 앵커리지, 함께 연에 있어!
앵커리지: 와아……. 높이높이, 날아올라!
앵커리지: 앵커리지, 세상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싶어…. "앵커리지는 선생님이 제일 좋아" 라고!

지휘관: 앵커리지가 그림을 정말 잘 그렸어.

앵커리지: 선생님이 칭찬해줘서, 앵커리지, 기뻐!
앵커리지: 연날리기! 같이 하늘을 나는 거 같아서, 더 기뻐!

앵커리지는 신이 나서 연을 들고 뛰기 시작했지만, 몇 발자국 못 가서 연은 힘없이 바닥에 내려앉고 말았다.

앵커리지: 으으……. 연이, 연이 안 날아….

지휘관: 풍향이 안 맞는 거 같아. 방향을 바꿔서 다시 해 볼까?
지휘관: 내가 연을 들고 뛸 테니까 앵커리지가 줄을 풀어 보자. 어때?

앵커리지: 응! 선생님, 믿을게!
앵커리지: 앵커리지, 선생님 말 잘 들어……!

내가 연을 들고 달려나가자 뒤쪽의 연줄이 점점 팽팽해졌다. 연이 날아오르려는 찰나 갑자기 줄이 뒤로 확 당겨졌다.
순간적으로 조여진 연줄에 손바닥이 베여 작은 상처가 났다.

앵커리지: 아! 미, 미안해……! 앵커리지, 너무 세게 당겼어……?
앵커리지: 선생님, 피 나…….
앵커리지: 으아앙, 미안해……. 앵커리지가…….
앵커리지: 맞다! 앵커리지…… 반창고 있어……!
앵커리지: 선생님. 앵커리지가, 치료해 줄게!

지휘관: 괜찮아. 이 정도는 가벼운 상처니까.

앵커리지는 쪼그려 앉아 내게 조심스럽게 반창고를 붙여줬다. 동작은 조금 서툴렀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앵커리지: 앵커리지, 더 조심할게……. 선생님의 손, 소중히 지켜야 돼!

그녀는 내 손바닥을 살며시 쥐었다. 눈동자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지휘관: 앵커리지가 잘 붙여줘서 이제 괜찮아.
지휘관: 다시 한 번 날려 보자. 이번에는 꼭 성공할 거야.

앵커리지: ……응. 다시 하자!
앵커리지: 연아……. 이번에는 높이높이 날아! 구름보다 더 높이!

나는 연을 들고 앞으로 달려갔다. 귓가에 바람 소리가 점점 세차게 들렸다. 마침내 연은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푸른 하늘을 빙빙 맴돌았다.

앵커리지: 날았어……. 선생님, 성공이야!
앵커리지: 우리가, 해냈어!
앵커리지: 앵커리지의 연이, 진짜로 날고 있어……. 선생님이랑 같이…….

앵커리지는 바람 속에서 얼레를 꼭 쥐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하늘 높이 떠 있는 연이 비치고 있었다.

앵커리지: ……이상해. 앵커리지의 가슴…… 말랑말랑하고 뜨거운 기분…….
앵커리지: 연……. 만약에 연이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앵커리지도…… 해 보고 싶어!


→ 그럼 난 바람이 되어서 앵커리지가 날 수 있게 도와줄게
앵커리지: 어……?! 그럼 살살…… 앵커리지를 받쳐 줘야 해! 떨어지면…… 무서우니까!

→ 그럼 난 다른 연이 되어서 앵커리지와 함께 날게
앵커리지: 응! 앵커리지도 계속…… 계속 선생님 곁에 있을 거야!


앵커리지: 연날리기, 나중에 또 같이 하자…… 응?
앵커리지: 1년에 한 번, 두 번…… 아니, 세 번, 다섯 번…… 많이 많이!

지휘관: 누구 연이 더 높이 나는지 시합을 해도 좋겠네.

앵커리지: 이기는 사람은 분명 선생님! 응……!
앵커리지: 그래도 선생님…… 앵커리지한테 져 주면 안 돼? 에헤헤…….

우리는 잔디밭에 앉았다. 연은 하늘 위에서 안정적으로 맴돌고 있었다. 앵커리지의 머리끝에 햇살이 머물렀고, 바람이 살랑이며 불어오니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앵커리지: 선생님…… 오늘 정말 즐거웠어!
앵커리지: 앞으로도…… 계속 이러고 싶어! 선생님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앵커리지: 연은 언젠가 떨어지겠지만…… 앵커리지와 선생님과의 약속은…… 떨어지면 안 돼!

지휘관: 그래, 약속할게.

앵커리지: 약속……. 계속 날고, 계속 함께하기……. 약속 어기기 없기!


 

● 재너스
 ~07. 다시 시작된 데이트
모항. 상점가

재너스: 지휘관님, 여기예요!

대답하기도 전에 재너스가 종종걸음으로 내 앞까지 달려왔다.

재너스: 갑작스러운 부탁인데도 기꺼이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재너스: 게다가…… 별로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는데…….

지휘관: 네 메시지의 어조는 전혀 가볍지 않았는걸.
지휘관: 그리고 재너스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중요한 일이지.

재너스: 으으……. 지휘관님은 늘 그러세요…….
재너스: 사실 오늘 뵙자고 한 건 약품 구매 때문이에요……. 지휘관님의 조언을 듣고 싶어서요!
재너스: 자세한 이야기는 걸어가면서 해도 될까요……?

지휘관: 그래. 안내해줘.

그 말이 용기를 준 듯, 재너스는 내 손가락을 살며시 잡고 길가의 약국으로 향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수많은 약품이 종류별로 가지런히 진열된 약장이었다.
재너스는 내가 망설이는 것을 알아차린 듯, 다양한 약품의 이름이 상세히 적힌 메모지 한 장을 즉시 건네주었다.

재너스: 그, 그게 말이죠…….
재너스: 어젯밤에 재고를 확인해 보니 상비약이 좀 부족하더라구요. 그래서 급하게 리스트를 작성해 봤는데…….
재너스: 감기약만 해도 종류가 너무 많아서……. 어느 게 가장 좋을지 몰라서 결국 지휘관님께 여쭤보게 됐어요…….

지휘관: 그렇구나. 동일한 효능의 약 중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은 거지?

재너스: 네, 맞아요!
재너스: 예를 들어 이 반창고는 지혈 효과가 좋고, 저건 방수 효과가 더 뛰어나거든요. 지휘관님이 혹시라도 다치셨을 때 생활에 큰 지장이 없도록…….
재너스: ……아! 지휘관님이 다치시길 바란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 그냥 혹시 모를 상황이 걱정돼서…….

지휘관: 그래. 네 마음은 알겠어.

재너스: 마, 마음이라니……. 저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있을 하고 있을 뿐인걸요.
재너스: 제가 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제게 다정함과 배려를 베풀어 주시는 지휘관님처럼…….
재너스: 상처 입은 동료들의 곁에서 묵묵히 모두를 보살피는 일이니까요…….
재너스: 할 수 있다면 저도 언젠가 지휘관님을 위해…….
재너스: 아…… 아으으……. 저, 저기…… 지휘관님. 쳐다보지 말아 주세요…….

재너스는 당황하며 황급히 주저앉더니 달아오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었다.


→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지휘관: 재너스. 내 손 잡아.

재너스: ……네?

지휘관: 오늘 우리 데이트하는 거 아니었어? 기왕이면 손을 잡는 것도 잘 어울릴 거 같아서.

→ (함께 주저앉는다)
지휘관: 재너스. 약품 산 뒤에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

재너스: ……아이스크림이요?

지휘관: 오늘 우리 데이트하는 거 아니었어? 그렇다면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것도 정해진 코스 중 하나니까.


재너스: 지, 지휘관님. 언제부터 알아차리신 거예요?

지휘관: 네가 반창고를 분석하고 있을 때부터야. 사실은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 놨던 거지?

재너스: 여, 역시 지휘관님은 속일 수 없네요…….
재너스: 사실 저…… 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어요.
재너스: 하지만 이제는 지휘관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재너스: 제가 계속 지휘관님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지휘관님도 저를 생각해 주고 계신 거죠?
재너스: 저기……. 가끔, 정말 가끔이라도 좋아요.
재너스: 이렇게 지휘관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전 정말 행복해요.

지휘관: 재너스가 원한다면 언제든 괜찮아.

재너스: ……지휘관님은 늘 이렇게 저와 제 서투른 점까지 다정하게 감싸주시네요.
재너스: 지휘관님이 곁에 있어 주셨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어요.
재너스: 돌이켜보면 제가 용기를 내어 지휘관님께 인사를 건넸던 그 순간부터…… 지휘관님은 이미 저를 변화시키고 있었나 봐요.

재너스의 얼굴에는 아직 홍조가 가시지 않았지만, 그녀는 다시금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미소는 평소보다 더 맑았다. 눈동자에는 따스한 빛이 서려 있었다.

재너스: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드려요, 지휘관님……!
재너스: 우선은 그…… 지금부터 저희의 데이트를, 계속해도 될까요?

 

 

 

● 힌덴부르크

 ~08. 정해진 도박판

모항의 체스룸 안, 어두운 펜던트 조명이 힌덴부르크가 마련한 카드 게임 테이블을 비추고 있었다.
내 손에는 다이아몬드 10과 하트 7이었다—— 애매한 17점.


힌덴부르크: 17점이라… 21점 내기인 게임에서 참 절묘한 숫자네, 나의 계약자.
힌덴부르크: 너는 지금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면 심연이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 후훗, 결국 내 손바닥 안이지.
힌덴부르크: 보아하니 오늘 밤 카드 게임은 곧 결과가 나오겠는걸~
힌덴부르크: 역시 지루하게 시간을 때우는 것보다 짜릿한 게임이야말로…
힌덴부르크: 우리 데이트에 어울리지?
힌덴부르크: 이제 어떻게 할 거지?
힌덴부르크: 다음 카드에 희망을 걸어볼래? 아니면… 내가 엎어둔 히든카드에 운명을 걸어볼래?


힌덴부르크가 앞에는 펼쳐진 카드 한 장과 엎어둔 카드 한 장이 있었다——


지휘관: 펼쳐진 카드…  꽤 괜찮아 보이네…


힌덴부르크: 매혹적인 하트 A~
힌덴부르크: 자… 계약자여, 이제 선택해 봐~ Hit or Stand?

 


→ Hit

힌덴부르크: 좋아~ 난 계약자가 발버둥 치는 모습이 참 재미있어…
힌덴부르크: 자, 이 카드가 기적을 가져올까, 아니면 절망을 가져올까?


그녀가 밀어준 카드를 뒤집었다——그건 클로버 9였다.


힌덴부르크: 규칙? 계약자여. 네가 나와 이 게임을 시작한 순간부터…
힌덴부르크: 넌 이런 뜻밖의 두근거림을 기대했던 거잖아?

 

→ Stand
힌덴부르크: 오? 신중한 선택을 했구나…
힌덴부르크: 그렇다면 당신의 운명은 이제 내 손에 달렸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히든카드를 뒤집었다——그건 바로 다이아몬드 10이었다.

 

힌덴부르크: 후훗, 너는 카드 게임으로 자신의 귀속을 결정했을 때…
힌덴부르크: 이런 색다른 재미를 기대한 거 아니었어?


힌덴부르크: 오늘 밤, 행운의 여신은 계약자의 편이 아닌가 봐…
힌덴부르크: 이렇게 끝났네~


그녀는 나른하게 몸을 풀더니 내 앞으로 다가와, 내 턱을 들어 올렸다.


힌덴부르크: 약속대로——
힌덴부르크: 이번 데이트~ 너의 시간, 너의 시선, 너의 모든 것이… 승자인 나의 것이야.
힌덴부르크: 어때… 이의 있어?


힌덴부르크가 몸을 굽혔을 때, 나는 그녀의 가슴팍에 있는 하얀색 무언가를 봤다.
그녀는 그 찰나의 시선을 포착했다.


힌덴부르크: 오? 하하… 아무래도 계약자가 재미있는 걸 발견한 모양이네.


나의 지적에 그녀는 여유롭게 가슴골에서 카드 한 장을 뽑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그건 바로 하트 A였다.


힌덴부르크: 두 번째 하트 A야. 놀란 모양이네?

 


→ 이건 게임 규칙에 어긋나지 않아?

힌덴부르크: 좋아~ 난 계약자가 발버둥 치는 모습이 참 재미있어…
힌덴부르크: 자, 이 카드가 기적을 가져올까, 아니면 절망을 가져올까?


그녀가 밀어준 카드를 뒤집었다——그건 클로버 9였다.


힌덴부르크: 규칙? 계약자여. 네가 나와 이 게임을 시작한 순간부터…
힌덴부르크: 넌 이런 뜻밖의 두근거림을 기대했던 거잖아?


→ 네가 작정하고 일을 꾸몄구나?
힌덴부르크: 오? 신중한 선택을 했구나…
힌덴부르크: 그렇다면 당신의 운명은 이제 내 손에 달렸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히든카드를 뒤집었다——그건 바로 다이아몬드 10이었다.


힌덴부르크: 후훗, 너는 카드 게임으로 자신의 귀속을 결정했을 때…
힌덴부르크: 이런 색다른 재미를 기대한 거 아니었어?

 

 

그 순간, 그녀의 꼬리가 나의 손목을 휘감았다. 힘이 강하지 않았지만 단호함이 묻어있었다.


힌덴부르크: 네가 게임이 끝날 때까지 나의 '마법'을 간파하지 못했으니… 이제 그것이 '기정사실'이 되었지.
힌덴부르크: 그러니 이 데이트의 결말은 똑같아——
힌덴부르크: 남은 시간도 나와 함께 보내야 해.
힌덴부르크: 어쩌면 이 상황이 너를 불안하게 할 수도 있고, 즐겁게 할 수도 있겠지…
힌덴부르크: 너의 기분이 어느 쪽이든 오늘 밤 최고의 촉매제가 될 거야.


그녀는 꼬리를 조였다. 엄청난 힘으로 나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손은 내 목덜미를 스치며 승자의 희열과 기대감이 뒤섞인 눈동자로 나를 집어삼킬 듯 바라보았다.


힌덴부르크: 봐, 너는 너의 운명을 결정지은 이 카드 테이블조차 벗어날 수 없잖아… 여긴 우리에게 딱 어울리는 장소야.
힌덴부르크: 이제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시작해 볼까.
힌덴부르크: 내가 느끼게 해줄게…
힌덴부르크: …게임에서 지는 것보다 더 두근거리는 걸 말이야.



● 임플래커블
 ~09. 수녀의 회상
오르막길을 지나자, 눈앞의 녹음이 뚝 끊겼다.
해식절벽——해수과 중력에 의해 오랜 세월에 걸쳐 경이로운 지형이 만들어졌다.
임플래커블과 나의 다과회는 이 아름다운 절벽 위에서 시작되었다.


임플래커블: 멀리 바라보면 절경이고, 발밑을 굽어보면 낭떠러지——이곳에 서 있으면 아름다움과 무서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지~
임플래커블: 이곳은 나의 비밀 기지 같은 곳이야. 마음이 복잡하고 이상한 생각이 떠오를 때면 항상 이곳을 찾곤 해.

 

지휘관: 수녀가 고민이 있으면, 성당에 가야 하잖아?


임플래커블: 나는 지휘관을 찬양하는 수녀인걸?
임플래커블: 음… 비유하자면 지휘실로 가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임플래커블: 하지만 나는 이곳을 택했어.
임플래커블: 구름이 흩어지고 뭉치는 것을 바라보고, 바람과 파도의 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지거든.
임플래커블: 위험한 절벽 덕에 너무 깊게 빠져들지 않게 되었지…
임플래커블: 오늘 내가 이 비밀 기지를 지휘관에게 추천해줄게~


지휘관: 여기 정말 경치가 아름다운 좋은 곳이야.
지휘관: 하지만… 네가 명상할 때 오는 비밀 기지인데, 내가 오면 방해되지 않겠어?


임플래커블: 허허~ 마음이 복잡할 때, 명상으로 다스리는 것 말고 또 다른 방법이 있거든?
임플래커블: 조금 더 직접적인 방법~
임플래커블이 갑자기 내 쪽으로 밀착하더니, 나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임플래커블: ——네가 나와 함께 있어 주면 해결돼.
임플래커블: 허허… 너의 심박수가 빨라졌어.


지휘관: 흠… 이렇게 하면 마음이 더 어지러워지지 않을까?


임플래커블: 뭐라고 할까~
임플래커블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단정하게 앉아, 찻바늘로 테이블 위의 재료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임플래커블: 지휘관, 생각해 봐~ 인간은 충분한 자극을 받으면 오히려 평온해지잖아?
임플래커블: 이 차처럼 말이야.
임플래커블: 진하든 연하든, 쓰든 달든… 단숨에 들이키면 남는 것은 여운뿐이지~ 안 그래?


그제야 나는 찻주전자에서 흘러나온 황갈색 액체와 그녀가 만지던 재료들을 봤다.


지휘관: 고추, 계피, 카다멈, 강황… 바질… 그 동그란 건 인삼 슬라이스야?


임플래커블: 이번 데이트를 위해 내가 고심 끝에 준비한 특별 레시피야.
임플래커블: 오늘 처음 만들어본 건데 성공한 것 같네~


지휘관: 성공적… 이라고?


애틋했던 분위기에 '찻물'이 등장한 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뀐 듯했다…


지휘관: 그나저나… 아까 고민 탓에 마음이 복잡하다고 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야?


임플래커블: 음—— 자질구레한 일도 물론 있지만, 가장 큰 건 아무래도 차… 그리고 지휘관 때문이겠지?
임플래커블: 그래서 고민한 끝에 오늘 이 아이디어를 실행한 거야.
임플래커블: 너를 위해 새로운 차를 연구하고, 함께 그 차를 음미하고…
임플래커블: 그 후 너와 함께 짜릿한 시간을 보내며 고민을 잊는 거지. 이 또한 아름답고도 위험한 여운인 셈이겠지~
임플래커블: 자~ 지휘관, 차 마시자~
임플래커블은 사람을 홀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고 다가왔다.


지휘관: …혹시 '차'를 마시는 단계를 건너뛰어도 될까?


임플래커블: 지휘관, 지금 걱정하는 거야?
임플래커블: 음… 예전의 나라면 실패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번엔 가장 자신 있는 작품이야.
임플래커블: 레시피를 만들 때 바질로 장식하고, 계피로 풍미를 더했어. 내 머리카락 색을 내기 위해 강황도 넣었거든.
임플래커블: 게다가 몸을 따뜻하게 해줄 고추와 기력을 보충해 줄 인삼 슬라이스까지 넣었어…
임플래커블: 또한 꿀, 소금 그리고 후추로 맛의 풍미를 더했어.
임플래커블: 이보다 완벽할 수 없어!


지휘관: 내가 꿀과 소금, 후추를 미처 못 봤네…


임플래커블: 지휘관~ 정 걱정된다면 내가 먼저 마셔볼게~


지휘관: 아, 잠깐만——!


그렇게 나는 임플래커블과 함께 경치 좋은 비밀 기지에서 아름답고도 위험하며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