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저지
~01. 완벽한 계획
뉴저지: 안녀~~~엉 허니~!
어깨를 두드림과 동시에 특유의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그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돌릴 필요도 없었다.
뉴저지: 약속 시간보다 한참 전이잖아.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뉴저지: 아…!
뉴저지: 알겠다. 오늘 데이트가 너무 기대돼서 그런 거구나? 허니?
뉴저지: 으흠! 엄청 귀엽고 엄청 똑똑하고 엄청 강력한 최대 최강 슈퍼 블랙 드래곤이자 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푹 빠진 사랑스러운 뉴저지 양과 데이트를 하게 됐으니 그럴 만도 하지!
→ 슈퍼 블랙 드래곤…?
뉴저지: 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 아무튼 이 중에 적어도 하나 이상은 맞잖아? 그치?
뉴저지: 아무튼 농담이었으니까 넘어가자! 그러면――
→ 사실 엄청 기대하고 있었어
→ 사실 정말 정~말 기대하고 있었어!
뉴저지: 저, 정말? 흐흐응…….
뉴저지: 허니가 먼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공격하면 얼굴 빨개지잖아!
뉴저지: 으흠! 아무튼 오늘 데이트 계획은 완벽하게 준비했으니까!
뉴저지: 허니는 긴장 풀고 내 리드에만 따르면 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게 해줄게!
뉴저지: 첫 번째로 갈 곳은… 극장이야!
→ 아침부터 영화 보는 거야?
뉴저지: 그치만 엄청 좋은 영화가 상영 중이거든! 허니도 분명 좋아할 거야!
→ 그거 괜찮네!
뉴저지: 예이~ 벌써부터 기운이 넘치네 허니~! 그런 자세 참 보기 좋아!
뉴저지: 아, 깜빡할 뻔했다….
뉴저지: 자, 손잡아! 후후~ 깍지 안 끼면 데이트 느낌이 안 나잖아~
뉴저지: 좋아 그럼… 극장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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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말대로 극장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으로 상점가, 수족관 등등….
뉴저지가 자기 리드에만 따르면 된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하루 종일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코스와 이벤트를 계획했으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내 해가 지기 시작했다――
뉴저지: 허니. 여기가 마지막으로 들릴 데야~
뉴저지: 타이콘데로가도 인정한 소규모 버거 가게!
뉴저지: 맛있고 양도 많고 랜덤 상품도 있어!
뉴저지: 하루 종일 실컷 놀아서 배고프지? 얼른 들어가――
닫힌 문 앞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뉴저지의 말과 발소리가 멎었다.
뉴저지: “사정이 있어 오늘 하루 쉽니다. 내일부터는 다시 정상 영업 합니다~”…?
뉴저지: …말도 안 돼?!
뉴저지: 다 좋았는데… 마지막에 망쳤어….
내내 자신감에 차있던 뉴저지였지만 지금은 실망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뉴저지: 미안해 허니. 미리 알아봐서 더 철저하게 준비했어야 하는데….
지휘관: 모든 걸 다 예상할 수는 없잖아. 가끔은 이런 일도 있는 거지.
지휘관: 너무 낙담하지 마. 다른 좋은 곳 알아보면 되지.
뉴저지: 후후. 허니는 참 다정하다니까…. 그럼 나도 기운 차려야지!
뉴저지: …아, 맞다! 예비 계획으로 꼽아뒀던 데가 한 군데 있어!
뉴저지: 가자 허니~! 지금쯤이면 로열 아일즈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을 거야! 가서 이쁜 데 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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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후 뉴저지는 갑자기 노트를 꺼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뉴저지: 이번 일로 얻은 교훈은….
지휘관: (데이트를 위해서 노트까지 준비한 거야…?)
나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뉴저지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오려낸 사진과 지도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지도에는 다양한 원과 선이 그려져 있었고, 언뜻 ‘중대 공세’, ‘전면적 전진’ 같은 단어까지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완성된 본격적인 작전 계획’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게다가 여백에 다양한 포스트잇까지 붙어 있다. …타이콘데로가가 추가한 건가?
아니… 진지하게 필기하는 뉴저지를 보면 저것도 뉴저지가 붙인 건가?
뉴저지: 허~니! 여자의 다이어리를 그렇게 훔쳐보면 안 되지?!
뉴저지: 여자라면 누구나 비밀이 있다구! 아무리 정중하게 부탁해도 안 보여줄 거야!
뉴저지: …근데 혹시……봤어?
→ 전술 전투 지도를 본 거 같아
뉴저지: 후훗~ 비슷하긴 한데 나라면 전술 데이트 지도라고 부를 거야~
→ 포스트잇 몇 개만 봤어
뉴저지: 후후~ 나와 크루들의 협업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지~
뉴저지: 휴… 그 정도만 봤다면 다행이네. 일정까지는 못 봤으니 계획은 아직 진행 중인 걸로~
뉴저지: …사실 저녁 식사 때 허니한테 줄 깜짝 선물을 준비했거든.
뉴저지: 버거 가게는 못 갔지만 여기서 해도 괜찮겠지.
뉴저지: 허니, 눈 감아 봐…. 그리고 앙~ 해봐!
뉴저지: 그렇게 있기! 눈 뜨면 안 돼?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은은한 향기가 코에 와 닿았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 과일의 달콤한 과즙이 이 사이로 피어났다.
뉴저지: 후후. 이제 눈 떠도 돼 허니~!
뉴저지: 깜짝 선물 배송 완료~ 방금 준 사탕은 유니온에서 직송한 특산품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아카시네 가게에서는 구할 수가 없으니까.
뉴저지: 그래서, 어때?
뉴저지: 맘에 들면 다행이네~ 그리고 이 사탕에는 피로를 풀고 기분도 좋게 해주는 특별한 성분도 들어 있어!
뉴저지: 자, 그럼 이제 데이트의 마지막 일정인 저녁 액티비티를 즐길 준비는 되셨을까?
지휘관: 잠깐만… 저녁 액티비티?
뉴저지: 응! 자고로 데이트란 하루 종일 빈틈없이 꽉 차있어야 알차게 보냈다고 할 수 있지! 그러니 밤에도 일정이 있어!
뉴저지: 시간 다 됐겠다. 관람차 타러 가자 허니!
뉴저지: 정상에서 보는 경치가 진짜 아름답대!
내가 반응할 기회도 주지 않고, 아니 어쩌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이미 알고 있었는지, 뉴저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잡고 식당을 뛰쳐나갔다.
…미리 계산을 해놨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 잉루이
~02. 붓에 사랑을 담아
지휘관: 벼루, 붓, 선지에 먹…. 다 있는 거 같네.
예전에 잉루이에게 시간 나면 서예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잉루이는 웃으면서 언제 날을 잡아서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약속한 날이다.
잉루이: 지휘관님. 좋은 아침입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건넨 잉루이는 내가 마련한 책상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잉루이: 어머? 문방사보를 미리 준비하셨군요. ……후후. 지휘관님께서도 미리 공부를 해오신 모양이네요.
잉루이: 처음에는 그냥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관심이 있으셨군요.
지휘관: 언젠가는 서예도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거든.
잉루이: 손으로 직접 쓴 글이 인쇄된 글보다는 아무래도 더 감정이 드러나기 마련이죠.
잉루이: 그럼 먹부터 갈겠습니다. 지휘관님.
잉루이는 벼루에 물을 조금 부은 다음, 손을 뻗어 내 손등을 감싸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잉루이: 먹을 가는 데에도 요령이 필요하답니다.
잉루이: 먹은 수직으로 같은 방향으로 갈아야 하며, 벼루의 가장자리가 아닌 중심을 사용해야 손실을 줄이고 거품을 줄일 수 있습니다.
잉루이의 안내에 따라 내 손에 들린 먹은 벼루와 부딪히며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잉루이: 지휘관님. 앞으로 고민거리가 있다면 먹을 갈아 보세요.
잉루이: 먹이 갈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근심걱정도 사라진답니다…….
잉루이: 비밀이지만 지휘관님께만 특별히 알려드리는 거예요. 후후.
잉루이: 네. 이 정도면 충분히 쓸 수 있겠네요. 먹 가는 법을 잘 알고 계시네요.
지휘관: 아마 좋은 선생님이 있어서 그러겠지?
잉루이는 내 아부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 다음 그녀는 붓을 들어 갓 갈아낸 먹물에 담갔다.
잉루이: 지휘관님께서는 이제 막 시작하셨으니 붓을 쥐는 자세와 손놀림부터 천천히 배우셔야 해요.
잉루이: 그래도 붓을 쥐는 방법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니까, 제가 먼저 몇 가지 자세를 보여드릴 테니 그 중에서 편한 자세를 고르시면 되세요.
잉루이는 붓을 들어 내가 펼쳐놓은 선지에 ‘천하태평’이라는 네 글자를 썼다.
내 학습 속도를 고려해서인지 잉루이는 한 획 한 획을 매우 천천히 그었다.
‘천하태평’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새삼 느껴졌다.
잉루이: 앞으로는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사람이 무력으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지 않는 미래가 왔으면 좋겠어요.
잉루이: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한자리에 모일 수 있기를…….
고개를 숙인 잉루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조금 침울해진 것 같아서 위로해주려고 했을 즈음――
잉루이: 바쁜 업무에서 벗어나 매일 지휘관님과 함께 서예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세상이 평화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지휘관: 멋진 생각이네.
잉루이: 지휘관님. 반응이 너무 싱거우시지 않아요?
잉루이: 이럴 때 조금 더 설레고 감동받지 않으면 저 섭섭하답니다?
어떻게 말해야 잉루이의 맘에 들지 몰라서 그냥 방금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고 해명했다.
잉루이: 후후. 차오호처럼 이렇게 쉽게 속아넘어가실 줄은 몰랐네요. 그냥 장난친 거예요~
잉루이: 하지만, 세상이 평화롭길 바라는 마음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답니다.
잉루이: 혹 지휘관님께서는 동황의 어느 전설…… 아니, 속설에 대해 알고 계세요?
잉루이: 글을 쓰는 사람이 진정으로 붓과 먹에 마음을 담는다면, 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후세 사람들은 그 속에서 천 년 전의 정경을 엿볼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 그 마음이 충분히 강하다면?
잉루이: 물론입니다. 자필로 쓴 글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감성이죠.
→ 서예 실력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았어
잉루이: 어느 정도 관련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붓을 놀릴 때의 마음가짐입니다.
잉루이: 그럼 잉루이가 질문을 드릴게요. 지휘관님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가요?
지휘관: (마음이라……. 굳이 말하자면 세상의 평화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걸까.)
지휘관: 아직 붓 솜씨가 미흡하겠지만 비웃지 말아줘.
잉루이: 물론이죠.
잉루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머릿속에 떠오르는 글자를 단숨에 적어내려갔다.
잉루이: ‘천장지구’……. 지, 지휘관님. 무슨 말씀이세요?! 설마…….
-역주) 天長地久: 하늘과 땅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다. 연인들이 서로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랄 때도 쓰는 말인데 그래서 잉루이가 오해한 듯)
지휘관: 응? ‘천하태평’이라는 잉루이의 소원이 영원했으면 좋겠어.
잉루이: ……그런 뜻이었군요. 제가 오해한 것 같네요.
지휘관: 오해? ……뭘?
잉루이: 아아, 그러고 보니 지휘관님. 서예 실력은 확실히 더 연마하셔야 할 것 같아요.
잉루이는 내 질문을 완전히 무시하고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잉루이: 다음 시간에는 ‘목(木)’ 자를 어떻게 쓰는지 연습해 볼게요!
● 체셔
~03. 유리와 체셔 고양이
체셔의 권유로 수족관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체셔: 서방님, 저기 봐봐! 물고기들이 사람을 하나도 안 무서워해!
체셔 말대로 유리 너머로 큰 물고기가 몇 마리 헤엄쳐 다가왔다.
…유리에 찰싹 달라붙은 체셔를 향해 거품을 꼬르륵 내뱉고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체셔: 고양이 귀라서 놀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완전 괜찮아 보여!
지휘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 같네.
체셔: 응! 그럼 아무 걱정 없이 서방님하고 수족관 데이트 할 수 있겠다!
수족관 내부는 의외로 넓었다.
둘러보며 걷다 보니 관상어 코너에 도착했다.
체셔: 아까 물고기들보다 컬러풀해 보이네?
꽤 흥미가 생겼는지 체셔는 이쪽은 내버려둔 채 계속 수조를 바라보며 걸었다.
그녀를 따라가다 보니――
→ 물고기들이 따라오고 있네…?
→ 믈고기들이 체셔를 잡아먹으려고 해!
체셔: 진짜다! 아까부터 체셔 뒤를 따라오고 있어!
체셔: 정말! 이 고양이 귀 카츄샤가 보이지 않는 거냥?
체셔: 고양이 귀 카츄샤를 쓰고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을 먹으면 안 되지!
어째서인지 체셔는 진지하게 물고기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체셔: 서방님이 먼저 체셔를 놀렸잖아♪
체셔의 손가락이 유리창을 더듬었다. 물고기들도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체셔: 와아~~~!
체셔: 이러면…… 에헤헤♪
체셔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서 물고기들과 함께 원 같은 모양을 그렸다.
체셔: 서방님♪ 체셔가 뭘 그렸는지 맞춰봐~
→ 하트…인가?
체셔: 에헤헤~ 서방님한테는 너무 쉬웠냥♪
체셔: 응! 이러면 물고기들도 체셔가 서방님을 정말 좋아한다는 걸 알아주겠지♪
체셔: 서방님도 해봐! 이 아이들 엄청 얌전해!
체셔에게 이끌려 똑같이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더듬었다.
…하지만 체셔처럼은 되지 않았다. 물고기들이 생각대로 움직여 주질 않는다….
체셔: 서방님도 하트 그리고 싶은 거지? 체셔는 다 알아.
체셔: 그럼 체셔도 같이~ 물고기들한테 그리게 하자♪
체셔는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체셔의 움직임에 맞춰 나도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윽고――
체셔: 손가락 닿았다♪ 에헤헤~ 서방님 체셔하고 손잡고 싶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체셔는 나를 다른 코너로 끌고 갔다.
체셔: 응? 저건 뭐야? 서방님, 봐봐!
체셔: 투명한 물고기야! 예쁘다아♪
안내판에는 ‘글라스 캣 피시’라고 나와 있었다.
체셔: …글라스 캣 피시?
체셔: 글라스는 몸이 투명해서 그런 걸까냥?
체셔: 그러면 캣 부분은 저 삐죽삐죽한 수염이 고양이처럼 보여서?
체셔: 그렇구냥~ 보면 볼수록 닮은 거 같아!
체셔: 당신은 아쿠아리움의 물고기♪ 체셔는 모항의 물고기?
체셔: 너도 체셔도 똑같네♪
체셔: 고양이 같은데 고양이가 아냐♪ 고양이가 아닌데 고양이 같애♪
체셔: 서방님을 정말 좋아하는 동료인걸♡
이번에는 기묘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이 물고기도 맘에 들었어?
체셔: 응! 글라스 캣 피시도 서방님을 좋아하니까!
체셔: 저기 안내판에 나와 있지? 글라스 캣 피시는 외로움을 아주 잘 타는 물고기래.
체셔: 그러니까 체셔는 계속 서방님과 함께야♪
지휘관: ……으응? 뭔가 얘기가 도중에 바뀐 거 같은데…?
체셔: 그치만 서방님 물고기만 보고 체셔는 하나도 신경 써주지 않는걸!
체셔: 아! 저쪽에도 예쁜 물고기가 많이 있어! 서방님, 저쪽으로 가자!
사소한 장난이 끝나고 그대로 체셔에게 다음 장소로 이끌려 갔다.
● 시나노
~04. 샛별을 초저녁 꿈에 더하여
검은 바다와 검은 하늘.
뺨을 스치는 바닷바람도, 귀에 들리는 파도 소리도 없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세계.
출구를 찾아 고요한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했다――
시나노: 드디어… 그대를…….
낯익은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자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시나노: 그대는… 다시금 우연히 나의 꿈으로 빠져든 모양이구나….
시나노: 다만 그대와 만난 장소가 이런 곳이라니… 조금은 유감이어라….
→ 이건 악몽인가?
시나노: 아니. 이곳은 ‘악몽’이 아니다….
시나노: 내가 꾼 파편 중에서 이러한 세계는 ‘악몽’에도 미치지 못함이니….
시나노: 그대가 빠져든 꿈은… 현재… 달콤한 영원을 제공하는 은신처 같다….
지휘관: 악몽만 아니면 돼….
→ 아무튼 모래사장에 엎어진다
→ 시나노의 옆에 앉는다
시나노: 아아…. 여전하구나…….
시나노: 내가 말한 ‘달콤한 영원’에는… 관심이 없는 건가…?
시나노는 속삭이며 가볍게 몸을 맞대어 왔다.
꿈속의 오감은 가짜임을 알면서도, 시나노의 은은한 향기가 콧속을 자극했다.
시나노: 시간이 흐르지 않는 꿈….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다….
시나노: 그대와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무간의 어둠에 삼켜져 영원히 혼자 방황했을 터…….
시나노: 그대는…… 무서운가……?
→ 시나노야말로 무서워?
시나노: 무섭지 않다……. 단지…….
→ 시나노가 있으니 무섭지 않아
시나노: 나를 믿어주니 고맙구나……. 단지…….
시나노: 만물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대도, 지금 이대로 영원히….
지휘관: 그건 곤란한데….
시나노: 우리에 갇힌 것처럼, 난감하구나…….
시나노: 허나 이 우리를 낙원으로 간주할 수도 있음이니…….
시나노: 그대가 함께라면… 조금 더 여기서 세월을 거듭해도… 좋겠구나….
지휘관: …만약 내가 여기 없었다면 시나노는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시나노: 그렇다…. 이어진 파편이 부서질 때까지, 계속 보았겠지――
지휘관: 그래…….
시나노: 하지만, 우리와 영원도 이 꿈의 진실이 아니다. 오직 그대와 낙락하는 한때의 허언…….
시나노: 그대 덕분에 나는 조금씩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시나노: 설령 꿈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없더라도… 꿈의 세계에 거듭 빠져들면 다소의 요령도 터득할 수 있겠거니…….
시나노: 가령――
시나노는 칠흑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어느 한 구석을 가리켰다.
그림을 그리듯 손가락으로 하늘을 덧그리자 하나, 둘…… 무수한 별빛이 어둠을 걷어내고 청명한 밤하늘이 얼굴을 내비쳤다.
지휘관: 이건… 꿈을 바꾼 거야…?
지휘관: 혹시 그런 거라면…….
시나노: “조금 더 일찍 사용하지”…….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고 있다….
시나노: 하지만 지금 행동의 의미는 다름이라….
시나노: 이곳에 있는 것이 나뿐이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테지…….
시나노: 그대가 있는 이상… 이 동천(洞天)도 나만이 꾸는 꿈이 아니니…….
시나노: 이 밤하늘도, 나만의 것이 아니니라…….
시나노: 그대가 시나노에게 있어서… 어둠을 쫓는 별빛과 같이, 사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향기가, 바람이, 은빛 머리칼이 뺨에 닿았다.
꿈속에서는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동천이 넓다 해도 맞붙은 두 사람에게는 작아 보였다. 먼 밤하늘의 빛조차도 손이 닿을 것처럼 느껴졌다.
아련하게 어두운 바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
시간의 모래를 어루만지는 조수는 무엇도 가져오지 않고, 가져가지도 않는다.
별과 바다, 현세와 꿈, 모든 것이――곁에 있는 당신과――하나가 될 때까지.
● 노시로
~05. 얼음 녹은 뒤, 벚꽃 바람
꽃의 수명은 짧다. 봄이 되면 모항의 꽃놀이 명소는 어딜 가나 북새통이다.
올해도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 날까지 즐기려고 했는데….
노시로의 강권으로 빙 돌아 뒷산의 어느 조용한 장소로 향하게 되었다.
노시로: 여기 같네요.
지휘관: 같다고?
노시로: ……네. 저도 여기 와보는 건 처음입니다.
노시로: 전에 어쩌다 시나노 씨에게 들은 곳인데, 언젠가 당신과 꽃구경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담아두고 있었어요.
노시로: 조금 멀리 돌아왔지만 이렇게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다니 데려온 보람이…….
노시로: ……으흠. 죄송합니다. 제 입장만 생각해서….
→ 꽃구경하기 좋은 장소네
→ 조용한 분위기라 맘에 들었어
노시로: 다행이네요. 꽃구경은 조용한 곳에서 하는 게 제일이니까요.
노시로: 솔직히 제 마음대로 갑자기 일정을 바꿔버리면 당신이 난처하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노시로: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입니다.
평소의 노시로라면 장소 변경도 진작에 계획을 세우고 사전 답사도 했을 테지만….
얘기를 듣자 하니 아무래도 이번엔 아니었던 것 같다.
노시로: 네. 당신 말대로 이번엔 저답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노시로: 그냥… 그, 이번만큼은 계획이라든가 논리적이라든가 그런 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바람이 부는 가운데 노시로는 흩날리는 머리를 바로 고쳤다.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바라보는 그녀.
벚꽃 비의 풍경도, 노시로의 웃는 얼굴도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
노시로: 아. 머리에 꽃잎이 붙었네요.
노시로: 가만히 계세요. 떼어드릴 테니까.
그녀의 손가락이 살짝 머리에 닿았다. 숨이 겹친 그 순간 마치 꽃잎조차 그녀의 향기를 머금은 것처럼 느껴졌다.
노시로: 이렇게나 예쁜데 금방 져버리는군요….
가는 손가락으로 꽃잎을 잡고, 노시로는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찰칵.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에 나도 모르게 사진으로 담아 버렸다.
노시로: ……?
지휘관: 금방 져버려도 이렇게 사진에 담으면 추억으로 남길 수 있으니까.
노시로: 그렇네요…….
노시로: 그럼 이번에는 제가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일들도 꼭 함께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노시로는 가져온 도시락과 식기를 돗자리에 정성스럽게 놓기 시작했다.
노시로: ……아차. 젓가락을 한 짝밖에…….
지휘관: 역시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아서 역효과가 난 거야…?
노시로: 네에….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니까요.
부끄러움에 뺨을 붉힌 노시로의 난처한 표정도――찰칵.
노시로: ?! 이, 이런 건 안 찍어도 돼요….
지휘관: 미안 미안.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라 그만….
지휘관: 그런데 난감하네. 젓가락이 한 짝밖에 없다면….
노시로: 따, 딱히 상관없는데요…?
노시로: 당신만 괜찮다면… 이렇게… 저어…….
연분홍색 세상 속에서 노시로와 한가로이 꽃놀이를 즐겼다.
●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06. 데이트 나이트 콘서트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초대로 근사한 음악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음악회는 끝났지만 아직도 음악의 여운이 남아 있어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힘들 정도였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공연은 어땠니, 아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후후. 대답을 기대하기엔 아직도 음악에 한껏 취한 것 같구나.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더는 물어볼 필요도 없겠어.
지휘관: 음악은 종종 사람을 그렇게 만들곤 하지. 초대해줘서 고마워.
지휘관: 그런데… 좀 놀랐어. 나하고 같이 관객석에 앉다니. 당연히 무대에 서서 지휘하거나 할 줄 알았는데….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그래. 보통은 내가 공연을 하곤 하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하지만 이번에는 네 곁에 앉아 함께 다정하게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그래서 평범한 청중이 되기로 한 거란다, 아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무척이나 즐거운 공연이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구나….
→ 아쉬운 점?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그래. 한 가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내가 공연을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구나.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내 음악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음악에 푹 빠져 있는 너를 보고 있자니 조금 질투가 나서 말이야. 후후.
지휘관: 가끔은 청중의 입장에서 무대를 즐기는 것도 괜찮지 않아?
지휘관: 그러니까, 나는 프리드리히 너와 함께 공연을 즐길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아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후후. 네 말이 맞단다. 무탈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어서 다행이야.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사실 몇 번이고 무대에 올라가서 지휘봉을 잡고 싶었어. 단지 네가 나에게 도취된 표정을 보고 싶었거든.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다행히도 네가 내 팔을 잡고 있었잖니. 그래서 자제할 수 있었단다.
나는 그제야 프리드리히의 아름다운 피부에 빨간 자국이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 미안, 나도 모르게…. 이렇게 꽉 움켜쥐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사과할 필요 없단다, 아가. 다 이해하니까.
→ 미안해…. 네가 나를 떠날까봐 나도 모르게 꽉 붙잡고 있었나봐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구나. 하지만 다 안단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자기도 모르게 음악에 깊이 심취해서 그랬던 것이겠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보호가 필요한 무구하고 연약한 아기처럼… 네가 내게 매달리는 것이 어찌나 가슴을 울리던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절실하게 나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이나 기뻤단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후후. 부끄럽니?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걱정하지 말렴 아가. 오늘 있었던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니. 네 모습은 오직 나만이 간직하고 있을 거란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그러니 앞으로도 나를 의지해 주겠니?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나와 있을 때는 좀 더 어리광 부려도 괜찮단다.
프리드리히의 부드러운 시선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돌아갈 때까지 아껴두려고 했었던 선물을 지금 주기로 결정했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이건…… 지휘봉? …우리들의 이름이 새겨진….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오늘을 위해 주문 제작한 거니…?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후후….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구나.
지휘관: 기대하고 있을게.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나도 너에게 들려줄 날을 기대하고 있을게. …우리 아가. 약속 하나 해도 되겠니?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다음에는 꼭….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네가 선물해준 지휘봉으로 공연을 할게.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그리고… 네가 황홀해하고 넋을 잃을 법한 가장 멋진 음악만을 네게 들려주겠어.
그녀는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 역시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와 고리를 맺었다. 이것으로 약속은 정해졌다.
그 순간 음악의 여운이 다시금 되살아나면서 프리드리히가 무대 위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음악의 세계에 또 다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후후. 보아하니 다음 일정은 조금 미룰 수밖에 없겠구나.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이 멋진 순간을 마음껏 즐기렴. 내 사랑하는 아가.
● 프린츠 오이겐
~07. 그녀의 숨결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중 우연히 프린츠 오이겐이 의무실에 몰래 들어가는 걸 발견했다.
지휘관: (어디 아픈 건가? 남한테 들키기 싫어서 그러나?)
지휘관: (혹시 모르니 따라가서 상황을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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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츠 오이겐: 어머, 여긴 웬일이야? 어디 아파?
프린츠 오이겐: 괜찮다고? 그냥 내가 여기서 뭐하나 싶어서 따라온 거라고?
프린츠 오이겐: 후후. 둔감하기는. 사람이 의무실에 왜 오겠어?
프린츠 오이겐: 그래도 뭐, 덕분에 여기서 뭘 하면 좋을지 생각났어.
프린츠 오이겐: 지휘관~ 오늘 하루도 숨 돌릴 틈 없이 바빴지?
프린츠 오이겐: 기왕 온 거니까 이 기회에 진찰 한번 받아보는 건 어때…?
프린츠 오이겐: 아니면… 날 두고 떠날 셈이야?
오이겐은 ‘아니’라는 대답은 추호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이겐은 의무실 문을 잠그고 문틀에 기댔다. 그녀는 “여기서 도망가진 않겠지?”라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 진찰에 응한다
프린츠 오이겐: 아하하…. 자신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진정 현명하다고들 하지. 지휘관도 그 정도는 잘 알고 있나 보네~
→ 마음속으론 거절하고 싶지만 응한다
프린츠 오이겐: 당연히 그래야지~
프린츠 오이겐: 최선을 다해 협조해줘 지휘관. 혹시 알아? 나중에 뭐라도 떨어질지~
프린츠 오이겐: 그럼… 어디부터 시작할까~
오이겐은 건강검진 양식이 끼워져 있는 클립보드를 능숙한 손짓으로 들었다.
프린츠 오이겐: 신장, 체중, 신체 측정은 전하고 동일하니까 일단 생략할게.
→ …전하고
→ 동일…?
프린츠 오이겐: 사소한 걸로 호들갑 떨지 마 지휘관. 네 몸 상태가 어떤지 아는 건 당연하잖아? 그리고… 누군가가 네 몸에 대해 이렇게 세밀하게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 좋지 않아?
지휘관: ……….
프린츠 오이겐: 좋아. 그럼 감각 테스트를 해보자~
지휘관: …감각 테스트?
프린츠 오이겐: 네 오감이 제대로 기능하는지 한번 확인해 볼까?
프린츠 오이겐: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프린츠 오이겐: 그럼 위에서부터 시작할게.
프린츠 오이겐: 첫 번째 질문. 지휘관. 나 평소하고 뭐 다른 점 없어?
지휘관: …뭐?
프린츠 오이겐: “뭐?”가 아니지. 지금 시력 기능 테스트 중이라구.
프린츠 오이겐: 그래서, 나 뭐 다른 점 없어?
→ 함정 질문이네. 평소하고 다른 점은 하나도 없어!
프린츠 오이겐: 후훗. 틀렸어~
프린츠 오이겐: 정답은… 전보다 더 상쾌하게 웃고 있습니다~
→ 음… 오늘따라 미소가 더 상쾌하네?
프린츠 오이겐: 후훗. 틀렸어~
프린츠 오이겐: 정답은… 평소하고 다를 게 없답니다~ 좀 더 환하게 웃고 있진 하지만~
지휘관: 뭐라고 말했든 틀렸다고 할 거였잖아….
프린츠 오이겐: 그치만 놀릴 때 네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가 없는걸~
프린츠 오이겐: 뭐, 장난은 이 정도로 하고. 합격으로 간주할게.
프린츠 오이겐: 다음은 청력 검사야. 눈 감으세요~
눈을 감기 전에 오이겐이 소리굽쇠를 집어드는 게 보였다.
지휘관: (이번에는 진짜 검사인가 보네. 좋아….)
하지만 귀에 와 닿는 것은 소리굽쇠의 진동이 아니라 소녀의 따뜻한 숨결이었다.
프린츠 오이겐: Ich liebe dich...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매혹적이어서 마치 환청을 듣는 듯했다.
프린츠 오이겐: 이제 눈 떠도 돼, 지휘관. 보다시피 소리굽쇠는 그냥 소품이었어~
프린츠 오이겐: 후훗. 지휘관. 청력에 이상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방금 들은 내용을 다시 한 번 말해줄래?
프린츠 오이겐: …뭐? 놀라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프린츠 오이겐: 후훗… 아하하하….
오이겐은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주위에서 불만의 오라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프린츠 오이겐: 그러고 보니 틸레가 너더러 때때로 ‘선택적 난청’을 앓는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지.
프린츠 오이겐: 하필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인 걸까?
프린츠 오이겐: 어머나, 조심히 다뤄야겠네~ 나중에 혹시라도 중요한 명령을 놓치면 큰일 날 테니까 말야~
어쩐지 갑자기 의무실 온도가 뚝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든다….
프린츠 오이겐: 걱정 마, 지휘관. 진찰 기록에 네 사소한 문제까지 하나하나 진실되고 철저하게 기록할 테니까.
프린츠 오이겐: 그럼 후각, 미각, 촉각 검사를 순차적으로 진행할게.
프린츠 오이겐: 마음 단단히 먹어. 지휘관~
● 에기르(https://arca.live/b/manjuugame/94622451)
~08. 비 내리는 장면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
퇴근 후 문득 생각이 나 야외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하지만 본래 야경을 즐기기 좋은 장소였던 테라스는 지금 이 순간 단점만 도드라졌다.
등불이 켜진 밤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와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았으니까.
??? : 지휘관? 왜 이런 날씨에 밖에 있는 거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시야 사각지대에 있던 에기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휘관 : 뭐… 그냥 끌려서?
에기르 : 정말 성의 없는 대답이네. 한 잔 할래? 여기 술은 정말 맛있거든.
→ 미성년자는 음주 금지야!
에기르 : …뭐? 농담이지?
→ 술을 마시면 사고에 지장을 줄 수 있으니, 역시 마시지 않는게 좋겠어.
에기르 : 개인적인 시간에도 이렇게 엄격하게 구는 거야? 정말이지, 자기 관리 최고봉이라니까.
→그럼 한 잔 할까.
에기르 : 마음에 드는 대답인 걸!?
에기르 : 사실 나도 장난친 거야. '술'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특별히 제조된 맥아맛 음료라고.
그녀는 호박색 액체가 담긴 유리잔을 내 앞에 들고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지휘관 : 그러고보니… 에기르는 왜 혼자 여기 있는 거지?
에기르 : 바다의 난폭함을 감상하기 위한 적당한 장소를 찾고 싶었거든. 흐음… 지휘관처럼 나도 그냥 끌려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에기르 : 비를 피해야하니까 안으로 들어갈래? 괜히 감기걸리면 업무에 지장이 갈 테니까.
에기르 : …왜 날 쳐다보는 거야?
→ 에기르는 감기에 걸리면 어떡하려고?
에기르 : 쳇, 황량한 바다의 신은 이런 작은 빗방울에 지지 않아.
에기르 : 게다가 빗물에 몸과 마음의 피곤함을 씻어내는 것도 기대돼.
→ 만약 괜찮다면, 에기르와 함께 비를 맞을게.
에기르 : 나랑 같이… 너, 너 바보야!?
에기르 : …아무리 내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해도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해줘!
에기르 : ……알겠어, 나도 안으로 들어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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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를 사이에 두고 가게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에기르 : …가끔 이렇게 비를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에기르가 창 너머 빗물을 몰고 온 강풍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세상을 가리켰다.
에기르 : 봐… 지금의 바다는 위험해보이지만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아?
그녀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채 황금빛 눈망울로 먼 해수면을 바라보고 있었고, 입술 사이로 애매한 말을 흘렸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더니 그녀의 뺨을 타고 가녀린 목을 따라 더 깊은 곳으로 흘러내렸다.
에기르 : 지휘관 ?
황금빛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쳐졌다.
에기르 : 흐흐흐, 그 멍청한 표정은 뭐야? 설마 나한테 반한 거야?
→ 맞아
에기르 : 에?! 저, 정말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에기르 : …흥.
→ 에기르의 말처럼 반한 것 같아.
에기르 : 에?! 저, 정말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에기르 : …흥.
→ 달빛이 정말 아릅답네.
에기르 : 달빛...? 이렇게 짙은 먹구름에 대체 달빛이 어딨다는 거야…
에기르 : 서, 설마 또 사쿠라 엠파이어의 무슨 고전같은 거야!?
에기르 : 너, 너... 흥!
그녀는 부끄러워 안전부절 못하는 듯 자리에서 여러 번 자세를 바궜다.
지휘관 : 이럴 때 에기르의 반응은 정말 재밌네.
에기르 : 야, 조용히 안하면 입을 물어뜯어버릴 줄 알아!
지휘관 : 난ㅡㅡ
뭔가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시야에 에기르가 가까워졌다.
은은한 맥아향과 함께 입술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하지만 곧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지휘관 : 으아, 아파…
에기르 : 흥, 내가 경고했지? 자업자득이라고!
에기르 : 바다의 신이 너에게 주는… 벌이야.
그녀가 잔을 들자, 황금빛 눈동자는 호박색 액체에 의해 부드럽게 빛났다.
커튼 밖,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 아타고(https://arca.live/b/azurlane/98687678)
~09. 쿠키 타임
모항·지휘실
아타고: 지휘관, 직접 만든 쿠키를 먹어봐~ 갓 구워진 거야.
여느 때와 같이 분주한 오후, 갑자기 아타고는 보온백을 들고 지휘실을 찾아왔다.
아타고: 누나가 지휘관만을 위해 손수 만든 거니까~ 꼭 먹어줬으면 좋겠어!
→ 아직 일하는 중⋯⋯
아타고: 누나는 적당한 때에 온 것 같은데, 점심시간은 휴식을 취하는 시간인걸~
아타고: 지휘관은 머리 쓰는 일이 매일 많으니까, 쿠키로 당분 보충이 좀 필요할 것 같아~
아타고가 보온백을 열자, 구운 쿠키와 크림이 섞인 달콤한 냄새가 지휘실을 가득 채웠다.
아타고: 응~ 지휘관, 누나가 정성 들여 만든 크림 쿠키를 먼저 먹어봐~
아타고: 자, 입 벌리고, 아――――
아타고: 에이~ 누나가 치과 의사도 아니고, 드릴 넣는 것도 아니니깐~ 빨리 입을 벌려, 아~
과자를 입에 물고 나니, 달콤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거기에 더해, 아타고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입술에 흔적을 남겼다.
아타고: 맛이 어때? 행복의 맛이 느껴지지 않니?
→ 식감도 맛도 다 좋아⋯⋯
→ 행복해⋯⋯
아타고: 후훗, 마음에 들었나보네~ 그럼 좀 더 먹어봐! 누나가 엄청 다양하게 만들어놨거든~
아타고: 다음으로는 이 길쭉한 초콜릿 핑거 쿠키를 먹어보면 어떨까~
아타고: 먼저 반죽을 막대 모양으로 만들고, 오븐에 넣어서 구운 뒤, 녹인 초콜릿과 사랑의 마법에 담그면 완성~
아타고: 듣고 있으니까 맛있을 것 같지? 자, 아~
초콜릿이 묻은 핑거 쿠키가 입에 들어가자마자, 살살 녹기 시작했다⋯⋯ 초콜릿의 맛이 매우 진하다.
아타고: 부드럽게 먹지 않아도 돼, 이로 건드려도 혀를 씹진 않아.
한 입 깨물어 먹으면, 초콜릿의 달콤함과 구운 비스킷의 진한 맛이 묘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아타고: 어때? 초콜릿 맛 쿠키는 마지막에 구워낸 거라서 향이 가장 가득할거야.
아타고: 다음으로 먹어볼 건 우유맛이야~
아타고가 직접 만들어 입으로 전해주는 쿠키를 맛보며, 일에 대한 생각은 잠시 잊혀졌다.
아타고: 단 것을 먹고 나니 지휘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는걸, 효과가 엄청난데?
아타고: 누나도 한 번 먹어볼게~
아타고가 갑자기 쿠키 반대쪽 끝을 깨물어, 볼이 서로 밀착되었다――
아타고: 맛있네, 지휘관~
아타고: 어, 턱부터 귀 밑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데?
아타고: 후훗~ 누나가 이렇게 계속 쳐다보는게 부끄러워?
아타고: 그럼 누나 사양하지 않을게~
아타고: 아앙~
아타고와 눈을 마주치면서, 아타고는 계속 과자를 깨물고, 거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뚝――
과자가 끊어졌다⋯⋯
아타고: 앗, 입술에 조금 힘이 들어갔나⋯⋯
아타고: 근데 누나 알아챘어, 지휘관도 즐기고 있다는 걸~ 그러면⋯⋯
아타고: 아직 딸기와 바나나 맛이 남았는데, 다음에는 무엇을 먹어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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