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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망월초

킹루클린 2023. 9. 15. 15:54

 ~01. 경계의 바다

현재. 중앵 어느 곳.

 

밤의 장막 아래 일행들은 안개를 헤치며 천천히 나아갔다.

 

무사시: 조금 쌀쌀해졌네.

 

무사시: 분명 중앵 주변인데 북극의 바다로 들어선 느낌이야…….

 

나가토: . 신목에 있어야 할 온기가 사라졌구나.

 

무사시: 그렇다면 역시 대신목…….

 

미즈호의 힘이 넘치는 중앵 각지의 신목.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신목이 시들기 시작했다.

 

나가토: 그대의 예감이 적중했군. 바다가 울고 있다.

 

나가토는 바닷물을 건져 올렸다. 차가운 바닷물이 나가토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왔다.

 

나가토: 무사시. 생각건대 이번 이변의 전조는 이네.

 

무사시: 그래. 나도 파멸의 꿈을 꿨어.

 

무사시: 신목이 시들고, 세계가 어둠에 삼켜지고, 정적의 종말이 찾아오는 악몽.

 

무사시: 하지만 어느 꿈에도 신목을 지키는 대현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

 

나가토: 마치 그때의 재현 같구나…….

 

나가토: …….

 

무사시: 성역에 함대를 파견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나가토: 물론 생각해 봤다. 허나 함선을 보내 봤자 성역 주변을 맴도는 것이 고작이야.

 

나가토: 가장 안쪽에 있는 대신목은 결계의 비호를 받고 있다. 평범한 자는 다가갈 수조차 없느니라.

 

안개는 점점 짙어져 어둠이 항로를 뒤덮었다.

 

나가토: 무사시. 그대와 마지막으로 함께 싸운 지 꽤 시간이 흘렀네만, 지금도 그때가 눈에 선하니라.

 

무사시: 나가토 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었지. 그런데 그때의 상처는.

 

나가토: 이미 완쾌된 지 오래네. 허나 때때로 은은한 통증이 느껴지는군.

 

나가토: 어쩌면 이는 마음의 병일지도 모르겠어.

 

세 갈래의 항적이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리가 사라지고, 세상은 정적에 휩싸였다.

 

마치 갑자기 진공에 내던져진 듯, 몸도 영혼도 이승에서 벗어난 듯한 기묘한 감각.

 

다행히도 위화감은 곧 가라앉았다.

 

나가토: 도착했군. 대신목의 성역――

 

----

 

항로를 뒤덮은 어둠이 갈라지고,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이 아찔할 정도였지만, 그 빛에 적의는 없었다. 오히려 어딘가 온기마저 느껴졌다.

 

수평선에 있는 갈라진 틈을 통해 성역으로 들어서자, 일행 뒤에 있는 입구가 금세 닫혔다.

 

무사시: 성역…….

 

무성한 가지와 잎 사이로 부드러운 빛이 내려와 일행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벚꽃 날리는 하늘 아래 멀리 웅장한 폭포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어두운 바다 위에 감돌던 차가운 안개도 이곳에서는 연분홍빛 선운으로 변할 뿐이었다.

 

나가토: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곳은 전혀 변하지 않았구나.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나가토: 그때 대현자와 나눈 대화가 아직도 기억나는구나…….

 

 

 

 ~02. 와타츠미의 전설

과거. 중앵. 대신목의 성역.

 

대신목 밑동에 있는 작은 호수.

 

중앵의 대현자는 동료들과 함께 신목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무사시: 신목에서 손바닥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져.

 

나가토: 허나 그 감촉은 이내 바늘에 찔린 듯한 통증으로 바뀌었네.

 

이상함을 느낀 함선들은 일제히 손을 뗐다.

 

무사시: 방금은…….

 

대현자: “일찍이――

 

대현자: “일찍이 북천에서 떨어지는 별이 있었다.”

 

대현자: “별이 떨어진 바다에서 어둠이 나올 때, 미즈호의 수천을 떨며 울린다.”

 

대현자: “별은 중앵의 눈물에 한탄하며, 자신을 불태워 재앙의 어둠을 몰아내고 성역에 봉인했음이라.”

 

나가토: …….

 

무사시: 방금 대현자가 말한 것은 와타츠미초()에 나오는 옛 이야기인가?

 

무사시: 우리 중앵의 보물 와타츠미. 그리고 그 고사를 기록한 서책 와타츠미초』….

 

무사시: 지금 그 내용이 대신목의 이변과 관계가 있다는 거야?

 

대현자: 어호님. 무사시 님.

 

대현자: 어째서 여러분을 이 성역까지 안내했느냐고 여쭤보셨죠.

 

대현자: 와타츠미초의 이야기는 얼핏 듣기에는 황당무계하지만, 그 속에 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대현자: 대신목에 잠든 별 조각은 수백 년 동안 묵묵히 중앵을 재앙의 어둠으로부터 지켜왔습니다.

 

대현자: 허나 그 힘은 다하였고, 새어 나오는 부정으로 인해 신목의 힘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대현자: 부정을 씻어내어 봉인의 힘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사에 닥친 재앙의 어둠이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무사시: ……그런데 그대가 말하는 재앙이란 대체 무엇이지?

 

무사시: 지금 중앵의 힘으로 다시 몰아낼 수 있는 것인가?

 

나가토: . 세이렌과의 결전이 막 끝난 참이다. 현재로서는 전력이 회복되지 않았느니라.

 

나가토: 애초에 포화로 쓰러트릴 수 있는 존재라면 이미 이 위기를 해결하고도 남았을 테지.

 

대현자: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대현자: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대현자: 그 멸망의 재앙을 완전히 끊어내어 소멸케 하는 것.

 

나가토: 소멸…….

 

나가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대현자는 대답 대신 은은한 미소를 짓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신목의 힘에 호응하여 뿌리에서 하늘을 향해 연분홍빛의 선이 나타나 복잡한 모양――진문(陣門)을 이루었다.

 

결계라고 불리는 중앵의 술식이었다.

 

결계가 완성되자 이번에는 연분홍색 빛이 세 사람이 있는 공간을 덮었다.

 

대현자: 준비는 이미 되어 있습니다.

 

나가토: 성역의 수호자다운 참으로 훌륭한 솜씨로다.

 

나가토: 짐이 이것을 배웠을 때는 그다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리도 정묘할 줄이야.

 

대현자: 칭찬해주시니 영광입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무사시: 우리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미 결심을 굳혔어. 그러니 알려줘.

 

천둥과 번개를 휘감은 칼이 무사시의 손에 나타났다.

 

그녀는 칼을 뽑아 자루를 움켜쥐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현자: ……좋습니다.

 

대현자: 지금부터 별의 조각――「와타츠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대현자: 어호님께서 봉인 안으로 들어가셔서 와타츠미와 직접 대면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현자: 도중에 신목에 축적된 부정이 있을 것입니다만, 이 결계의 힘이 막아줄 것입니다.

 

대현자: 하지만 일단 봉인 안에 들어가면 와타츠미의 그림자로 변한 어둠이 덮칠 것입니다.

 

무사시: 나가토 님은 내가 지킬 거야. 계속해.

 

대현자: 감사합니다. 무사시 님.

 

대현자: 중앵 신앙의 대표이신 어호 나가토 님께서는 와타츠미와 직접 공명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대현자: 봉인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나가토 님이시라면 무사히 도달하실 수 있겠지요.

 

대현자: 이것은 다른 분께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현자: 일시적이지만 나가토 님께서는 와타츠미의 남은 힘을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현자: 와타츠미의 힘으로 우선 어둠을 밀어내고, 그 사이에 와타츠미를 대체할 봉인의 초석을 세워야만 합니다.

 

대현자: ……그리고, 제가 봉인의 초석이 되겠습니다.

 

대현자: 무사시 님. 술식이 완료될 때까지 부디 나가토 님을 지켜 주십시오.

 

대현자: 잘 진행되어서 저와 어둠이 소멸한다면, 봉인도 필요없어질 것입니다.

 

대현자: 그 때는 별의 조각와타츠미를 잘 부탁드립니다.

 

대현자: 비록 모든 힘을 소모하여 껍데기가 될 테지만, 그럼에도 중앵의 미래를 바꾸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대현자: 나가토 님, 무사시 님……. 부디 중앵을 지켜 주십시오.

 

대현자: 마지막으로…….

 

대현자: 무사시 님.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대현자는 소매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무사시에게 건넸다.

 

대현자: 근원을 복구할 방법은, 이 안에 있습니다.

 

무거운 공기가 주변을 맴돌았다.

 

그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03. 암흑의 허공

 

술식이 발동되자 눈앞의 풍경은 서서히 변색되었다.

 

웅장한 대신목은 급속히 시들고, 줄기는 마르고, 꽃과 잎은 떨어져 더 이상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대현자: 나가토 님, 지금입니다. 봉인으로 들어가세요!

 

부정의 어둠이 덮치기 전에 그들은 신목의 중심으로 발을 디뎠다.

 

대지가 갈라지고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폭발로 인해 하늘로 내던져진 대지는 마치 중력을 잃은 것처럼 그 자리에 떠 있었다.

 

이곳은 대신목의 중심, 별의 조각 와타츠미가 있는 곳.

 

신목의 뿌리 부근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윽고 뿌리가 모습을 드러내어 거대한 줄기와 함께 위로 떠올랐다.

 

찬란한 빛을 반사해서인지 주변의 흙덩이들은 마치 연분홍빛 수정처럼 보였다.

 

성역에서의 광경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그 모습에 압도되었다.

 

무사시: 엄청난 힘이네…….

 

무사시: 저것이 와타츠미」…. 아니, 그 수정의 중심이야말로――

 

무사시: ! 나가토 님!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낀 무사시는 칼을 쥐고 나가토에게 달려갔다.

 

재앙을 부르는 짙은 어둠이 그들을 삼키려고 다가오는 와중, 나가토는 사전에 들은 대로 와타츠미와의 접촉에 집중했다.

 

두 눈을 감고 의식의 세계에서 와타츠미의 존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빛은――폭풍 속에 보이는 등대처럼, 급류에 떠 있는 부목처럼 그녀를 인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가토: 떨어진 별의 조각이여! 짐의 앞에 그 빛을 보여라!

 

무사시: 나가토 님!

 

자전의 칼날이 소녀의 등을 붙잡으려는 검은 기운을 갈랐다.

 

나가토: 간발의 차였구나……. 무사시, 고맙다.

 

나가토: 와타츠미와 접촉할 수 있었다. 이제 봉인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야.

 

술식 덕분인지 허공 속 함선들의 발밑에 보이지 않는 해수면이 펼쳐졌다.

 

나가토: 이것으로 이동도 전투도 문제없겠지. 여기서부터는 짐이 안내하마.

 

나가토: 무사시는 엄호를 맡거라. 무언가가 봉인을 침식하려 하는구나.

 

어둠 속 와타츠미에서 무수한 빛의 줄기가 무슨 모양을 그리듯 천천히 뻗어 나왔다.

 

봉인의 술식을 나타내는 거대한 문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가토: 봉인의 중심으로 가자꾸나. ……!?

 

나가토: 주포, 일제 사격――!

 

포격은 검은 기운이 뭉치는 것을 막아냈지만,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무사시: 우타! 급선회!

 

나가토: ―――!!

 

검은 기운은 이번에는 거대한 짐승이 되어 그 큰 입을 벌리고 덮쳤다.

 

무사시: ……!

 

무사시는 의장을 소환하여 포탑 장갑으로 짐승의 송곳니를 받아냈다.

 

무사시: 물러나라!

 

주포가 불을 뿜었다. 포탄은 공중에서 작렬하여 부채꼴 모양으로 퍼지면서 검은 기운을 찢었다.

 

무사시: 나가토 님!

 

나가토: 알겠다! 삼식탄으로――

 

나가토: 주포, 일제 사격――!

 

촘촘한 탄막이 다시 검은 기운에 직격했다. 짐승은 이번에야말로 무너져 완전히 그 형태를 잃었다.

 

나가토: 무사시! 조심하거라!

 

반응할 새도 없이 검은 기운이 다시 입을 벌려 무사시의 의장을 물어뜯었다. 의장 일부가 뜯겨 나가면서 불꽃이 튀었다.

 

무사시: 크윽――!?

 

무사시: 몸 전체를 구현하지 않고 단순히 입만 만든 건가!

 

무사시: 마치 스스로 학습하고 있는 것 같군.

 

무사시: 하지만 나가토 님을 방해하게 둘 수는 없어!

 

무사시: 포격이 안 된다면 이 번개로!

 

―――!!!

 

무사시가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아온 참격이 검은 기운을 갈랐다.

 

참격이 가른 검은 기운의 단면부가 증발하듯이 끓기 시작했다.

 

마치 달궈진 철판 위에 뿌린 물처럼, 검은 기운은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무사시: 대현자구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지켜주고 있어.

 

무사시: 검은 기운의 기세가 약해졌어. 나가토 님. 이대로 전진하자.

 

무사시는 의장을 모두 해제하고 칼 한 자루만 남겼다.

 

그리고 앞을 가로막고 있는 어둠을 향해 칼날을 겨누었다.

 

무사시: 영야를 비추는 벽력이여. 나의 칼 끝에 모여라.

 

무사시: 자전일섬――!

 

칼날에서 뿜어져 나온 번개가 어둠을 걷어내고 나아갈 길을 만들었다.

 

무사시: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얼른 움직이자!

 

 

 

 ~04. 엮인 조각

봉인의 중심에 도착한 일행은 술식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나가토: 결계가 아직 침식을 막아내고 있다.

 

나가토: 대현자의 술식이 완성될 때까지 반드시 와타츠미를 지켜야 한다.

 

나가토: 만약 와타츠미가 먼저 파괴된다면 봉인 자체가 무너질 것이야.

 

무사시: 그래.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네.

 

무사시는 이미 말라버린 대신목의 줄기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기운이 뭉쳐 만들어낸 짐승이 거대한 눈을 부릅뜨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흉흉한 모습은 그야말로 재앙 그 자체였다.

 

그리고 더 위를 올려다보니――

 

무사시: 유성? 아니, 저건대현자…….

 

무사시: “북천에서 떨어지는 별이 있었다.”――『와타츠미초의 묘사와 똑같아.

 

무사시: 대현자가 재앙의 중심으로 가고 있어!

 

나가토: “자신을 불태워 재앙의 어둠을 몰아내고……. 설마 대현자 자신이……?

 

무사시: 자신의 목숨까지 불태우겠다는 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 신목과 충돌했다.

 

와타츠미에서 터져 나온 강렬한 빛이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

 

나가토: 이건……?!

 

칠흑 같은 바다가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구름 속에서 나타난 괴물이 으르렁거리며 모든 것을 먹어 치웠다.

 

신목은 불타고 있었다.

 

검은 용이 신목의 줄기를 그 송곳니로 찢었다.

 

황급한 소리: “도망쳐!! 얼른 도망쳐……!!!”

 

무사시: 이곳은…… 중앵의 마을?

 

무사시: 나가토 님, 저건……!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 하늘과 대지의 경계가 먹물에 물든 듯 모호해졌다.

 

도망치는 사람들. 불길에 휩싸인 거리. 하늘에 떠 있는 핏빛 달.

 

마을의 중앙――천수각 꼭대기에 흰옷을 입은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재앙의 어둠을 내려다보며 어딘가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나가토: ……대현자…….

 

나가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현자는 몸을 날려 한 줄기 빛이 되어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빛이 어둠을 찌르고, 큰 충격이 잇달았다.

 

----

 

눈앞의 풍경은 또 다시 바뀌었다. 대신목의 성역.

 

하늘은 푸르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뺨을 어루만졌다.

 

멀지 않은 언덕에 흰옷을 입은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나가토: 대현자……!

 

나가토: 방금 환상들은 대체……? 그대는 괜찮은 건가?

 

대현자: 나가토 님. 그리고 무사시 님.

 

대현자: 두 분께서는 분명 을 꾸셨습니다.

 

대현자: 혹자는 꿈에 대해 현실의 연장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마음의 반영이라고도 합니다.

 

대현자: 하지만 두 분과 달리 저는 벌어질 수 있는 미래의 꿈을 꿉니다.

 

대현자: 저는 파멸의 미래를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대현자: 날이 갈수록. . 몇 백 번이나.

 

대현자: 저는 꿈속에서 모든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대현자: 하지만 결국. 어쩌면 저는 처음부터 이 문제의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대현자: 부정의 그림자」――저는 그것을 이렇게 부릅니다.

 

대현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그것은 별이 떨어지는 궤적을 따라 몰래 내려옵니다.

 

대현자: 와타츠미부정의 그림자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그 연결은 영속적입니다.

 

무사시: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

 

대현자: 무사시 님께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있으십니까?

 

대현자: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도 있는 법입니다. 본디 그것들은 서로를 견제하면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할 테지만.

 

무사시: 대현자. 와타츠미란 대체 뭐지?

 

대현자: 그것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께서 말하는 큐브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대현자: 그런즉 큐브의 힘이 강해질수록 검은 기운의 힘도.

 

무사시: ……갑자기 믿기 어려운 이야기네.

 

무사시: 와타츠미와 큐브가 같은 존재라고?

 

대현자: ‘큐브는 인위적인 호칭일 뿐입니다. 큐브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와타츠미는 존재했습니다.

 

대현자: 무릇 인간이란 자신의 창조에 환희하지만, 가장 위대한 창조자는 자연 그 자체인 법이지요.

 

대현자: 굳이 정의하자면, 용골의 힘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대현자: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인간의 인지적 잣대로 정의하지 않으면, 근원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무사시: ………당신은, 대체…….

 

대현자: 자연이 세운 기초이자, 무수한 소망에서 탄생한 기적적인 존재.

 

대현자: 와타츠미. 그것이 바로 저입니다.

 

일찍이 북천에서 떨어지는 별이 있었다.”

 

별이 떨어진 바다에서 어둠이 나올 때, 자신을 불태워 재앙의 어둠을 몰아냈음이라.”

 

―――!!!

 

굉음과 함께 와타츠미는 중앵의 땅에 떨어졌다. 그 거대한 충격은 낙하지점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작열하는 빛 속에서 연분홍색 결정이 나타나 하늘을 찌를 기세로 급속히 솟아올랐다.

 

나가토: 이것은…… 대신목…….

 

나가토: 어둠을 봉인하는 성역――

 

----

 

환상은 사라졌다. 나가토와 무사시는 다시 한 번 현재의 성역을 바라보았다.

 

대현자의 최후의 일격으로 부정의 그림자는 발버둥치며 크게 괴로워하고 있었다.

 

검은 기운이 사방에서 엄습했다.

 

무사시가 자전의 칼을 휘둘렀지만, 갈라진 어둠은 이내 다시 합쳐졌다.

 

나가토: 조람하라! 하아아압――!

 

나가토의 기도가 발한 빛이 어둠을 걷어냈다.

 

하지만 빛은 나약했다. 간신히 어둠의 침공을 막고 있을 뿐이었다.

 

나가토: 이런……!

 

나가토: …….

 

나가토: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수는 하나.

 

나가토: 무사시. 어호의 모든 힘을 그대의 칼에 주입한다면, 그 일격으로 최후의 활로를 뚫을 수 있을 것이야.

 

무사시: ……그건 안 돼.

 

무사시: 나는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나가토 님은…….

 

나가토: 중앵을 지키는 것은 무녀인 짐의 사명이니라.

 

나가토: 짐은 이미 맹세를 했다…….

 

나가토: 어호의 위광…… 똑똑히 보아라!

 

어린 소녀는 마지막 힘을 무사시에게 맡기고는 그녀를 홱 밀쳐냈다.

 

다음 순간, 검은 기운이 나가토를 삼켰다.

 

무사시: 나가토 님……!

 

모든 것이 끝없는 고요와 어둠에 잠겼다.

 

 

오와리: ………으으이게 대체 뭐야…….

 

먼 미래. 성역에서 일어난 일을 환상으로 보던 소녀가 있었다.

 

 

 

 ~05. 청풍과 청차

 

과거. 중앵. 나가토의 거처.

 

대신목의 성역에서 대현자가 어둠을 봉인하는 초석이 되기 전.

 

카와카제는 흰 찻잔에 맑은 차를 가득 따랐다.

 

각자의 앞에 찻잔을 분배한 카와카제는 한 번 인사하고 방 밖으로 물러나 살며시 문을 닫았다.

 

무사시: 대현자. 방금 대신목이 시들기 시작했다고 그랬지?

 

무사시: 나도 조사를 해봤는데 신목이 시들었다는 보고는 단 한 건이었어.

 

무사시: 이 일이 대신목과 관련이 있다는 건가……?

 

대현자: 두 분께 미리 알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현자: 중앵 곳곳에 있는 신목의 뿌리는 모두 대신목과 이어져 있습니다.

 

대현자: 침식으로 뿌리가 잘려나간다면, 아무리 신목이라 할지라도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대현자: 영양이 끊어진 신목은 언젠가 완전히 말라 버리겠지요.

 

대현자: 무사시 님께 보고된 이변의 원인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대신목에 있습니다.

 

문득 창밖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와 방 안으로 꽃잎 몇 장을 날랐다.

 

그 중 한 장이 기묘하게도 대현자의 찻잔에 떨어졌다.

 

대현자: 낙화가 소식을 전하는군요.

 

대현자: 신목의 침식은 이미 온 중앵에 퍼지고 있습니다.

 

대현자: 이대로 방치한다면 대신목을 비롯한 모든 신목이 고사할 것입니다.

 

나가토: 흐음……. 그것이 참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대처해야 하네.

 

나가토: 대현자. 침식의 근원은 혹 대신목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닌가?

 

대현자: 대신목의 어딘가라고 하면 할 수 있겠지만.

 

대현자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대현자: 침식의 근원은 대신목 그 자체입니다.

 

나가토: 무어라……!?

 

대현자는 아무런 말없이 그저 자기 찻잔에 떠 있는 꽃잎을 바라보았다.

 

――똑똑.

 

나가토: 카와카제냐?

 

카와카제: 나가토 님. 연회 준비가 끝났습니다. 내빈 여러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가토: 대현자.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세계 해군사관학교 대표단을 환대해야만 하네.

 

나가토: 그대가 운유를 좋아하는 것은 잘 아네만 며칠 더 이곳에 머물러 주지 않겠나? 신목의 대처에 대한 의논은 그 이후에 하는 것이 어떤가?

 

나가토의 제안을 들은 대현자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넓은 방 안에 풍경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대현자: ……그럼 잠시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어호님.

 

원하던 대답을 들어서 그런지 나가토의 표정이 약간은 누그러졌다.

 

나가토는 남은 차를 마시고, 종자의 안내를 받아 퇴실했다.

 

어린 소녀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

 

대현자: 무사시 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대현자: 동생 분시나노 님의 근황은 어떻습니까?

 

무사시: ……그대에게는 숨길 수가 없군.

 

대현자: 죄송합니다. 혹시만나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사시: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무사시: 하지만 오늘은 날이 너무 늦었어. 내일 다시 방문해 줄 수 있을까?

 

대현자: 알겠습니다. 무사시 님의 뜻대로.

 

무사시: 그럼 나도 볼일이 있어서 실례할게. 부디 편하게 있어줘.

 

무사시도 방을 나갔다. 대현자 혼자만이 남았다.

 

별다른 예정은 없다. 그녀는 정원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남은 차를 마시기로 했다.

 

때는 벌써 저녁 무렵. 연못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연회에 가는 것 또한 한때의 여흥일까.

 

 

 

 ~06. 원항의 기점

 

과거. 중앵. 무사시의 거처.

 

다음 날. 무사시의 초대를 받은 대현자는, 시나노의 방을 찾았다.

 

귀를 기울이니 얉은 장지문 너머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상황을 확인하고, 다시 살며시 닫았다.

 

대현자: ………….

 

무사시: 시나노도 설마 신목의 이변에 관계가 있는 건가?

 

대현자: 아뇨. 아마도 우리의 근원」――즉 용골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대현자: 특별히 시나노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근원의 손상은 후천적인 수단으로 복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무사시: 혹시나 해서 묻는데, 아마기도……?

 

대현자: ………하지만.

 

대현자: 치료할 방법이 전무한 것은 아닙니다.

 

대현자는 난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대현자: 대신목의 성역으로.

 

대현자: 무사시 님. 나가토 님과 함께 대신목의 성역으로 오십시오.

 

대현자: 지금은 이렇게 무사시 님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제 본체는 그 성역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현자: 그러므로 중요한 이야기는 가급적 성역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현자: 대신목 밑에서, 여러분께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무사시: 대현자. 그대가 하고픈 말은 알겠지만.

 

무사시: 왜 나와 나가토 님이지?

 

대현자: 어호의 이름을 계승한 나가토 님은 유일무이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현자: 그리고 무사시 님은 가장 강력한 전력입니다. 당신께서 호위를 맡는다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대현자: 신목 중앵을 수호하는 어호와 당신…….

 

대현자: 만일 제가 사라지더라도, 저를 대신하여 이 미즈호의 정토를 지켜 주시겠습니까?

 

 

 

 ~07. 불청객들

 

현재. 대신목의 성역.

 

성역 한쪽에 경계 근무를 서는 함선들이 있었다.

 

즈이호: 하츠즈키는 대체 어디 간 거야?

 

초소 마당을 청소하고 있던 소녀가 대신목 쪽을 바라보았다.

 

아사나기: 오와리를 찾으러 간다고 했다만, 실은 단지 심심했을 뿐이겠지.

 

즈이호: 그래? 근데 오와리 씨 나가기 전에 안색이 안 좋아 보이던데.

 

아사나기: 안색이? 호호호.

 

아사나기: 한밤 중 내내 악몽에 시달렸으면 누군들 안색이 나빠지지 않겠느냐!

 

즈이호: 흐응. 우리한테 얘기라도 해주지.

 

즈이호: 이렇게 갑자기 사라진 적은 처음인데.

 

아사나기: 즈이호는 걱정이 많구나.

 

아사나기: 이런 한적한 곳에서 사건이 터지진 않을 게야.

 

아사나기: 이곳이 어디더냐. 중앵의 영지, 대신목의 성역이 아니더냐?

 

아사나기: 게다가 어호님께서 직접 치신 결계도 있지.

 

아사나기: 설령 따로 행동해도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게다.

 

아사나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지.

 

즈이호: 쉬잇!

 

즈이호: 아사나기 씨! 오와리 씨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돼?

 

즈이호: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성역을 지키는 임무를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구!

 

즈이호: "어딜 봐도 사람은 없고 나무와 동물들 뿐이잖아! 이게 대자연이라는 느낌?"

 

즈이호: "완전 시골이네!'

 

즈이호: "왠지 나한테는 엄청 집에 온 듯한 느낌!"

 

즈이호: 라고 하던데?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아사나기: 호오. 그런 일이 있었구만…….

 

아사나기: 근데 그건 임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곳 풍경이 마음에 든 게잖나!

 

즈이호: , 아무튼!

 

즈이호: 성역 경비를 맡았으니까 제대로 일해야지!

 

즈이호: 아사나기 씨도 한가하면 오와리 씨와 하츠즈키 좀 찾아줘!

 

즈이호: 만약 무슨 일이 생긴 거면…….

 

 

그때 초소 밖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검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수평선에서 뛰쳐나와 초소 마당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즈이호: 무슨 소리지?

 

아사나기: 저쪽이다! 하츠즈키구나!

 

즈이호: 급해 보이는데. 뭔가 쫓아오고 있나?

 

하츠즈키: ――――

 

즈이호: 통신기가 울리네?

 

즈이호가 통신기 버튼을 누르자 아사나기도 가까이 다가왔다.

 

하츠즈키: 지지직――

 

하츠즈키: ……, 얼른 준비해……!

 

달리면서 말해서 그런지 하츠즈키의 목소리는 가쁜 숨소리로 인해 뚝뚝 끊겼다.

 

즈이호: 하츠즈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

 

하츠즈키: , 늦었어…….

 

하츠즈키: 즈이호! 아사나기 씨! 들고 있어??

 

그러나 두 사람의 관심은 온통 눈앞의 광경에 쏠려 통신기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분명 의장으로 항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오히려 전력 질주에 가까웠다.

 

즈이호: 하츠즈키. 엄청 빠르네…….

 

아사나기: 이거 35노트 정도는 되겠구나…….

 

즈이호: 다음에 즈이호도으아아!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지!

 

즈이호: 하츠즈키! 괜찮아!? 늦었다니 무슨 소리야?!

 

초소 인근 해역에 다다랐을 무렵 하츠즈키는 걸음을 뚝 멈추었지만 관성으로 인해 바다 위를 쭉 미끄러졌다.

 

하츠즈키: 하아하아하아아아아……….

 

즈이호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서둘러 달려가서 하츠즈키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하츠즈키가 손을 뻗어 즈이호를 멈춰세웠다.

 

하츠즈키: 이미 늦었어.

 

심호흡을 한 하츠즈키는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츠즈키: 완전히 늦어버렸어!

 

하츠즈키: 나가토 님하고, 무사시 씨. 그리고 다른 한 분이…….

 

하츠즈키: 이 대신목의 성역에 오셨다구!

 

아사나기: 나가토 님과 무사시? ……. 농담하지 말거라.

 

아사나기: 그 두 사람이 갑자기 이런 곳에 올 리가 없잖느냐.

 

즈이호: 으아아아! , 얼른 청소를 끝내야 돼!

 

하츠즈키: 거짓말 아니야.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구.

 

하츠즈키: 오와리 씨를 찾고 있었는데, 우연히 나가토 님이 바다 위를 항행하는 걸 봤어.

 

하츠즈키: 어호님의 모습을 헷갈릴 리가 없잖아.

 

아사나기: ……, 설마 진짜인 게냐?

 

하츠즈키: 진짜라고 했잖아! 잘못 본 거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즈이호: 으아아아 어, 어떡해.

 

즈이호: 일단 함재기를 띄워서 나가토 님이 어디까지 오셨는지 확인해야지.

 

즈이호: 하츠즈키는 안에 들어가서 좀 쉬어! 아사나기 씨는 나토리를 깨워줘! 그리고 방도 좀 치우고!

 

즈이호: 차도 준비해야지. 아직 안 늦었어!

 

즈이호: 지금 준비하면 나가토 님께서 오셨을 때는 아직 따끈할 거야――

 

즈이호: 차암! 왜 다들 멍하니 서 있는 거야!

 

아사나기: , 알겠다! 바로 가마!

 

평온했던 초소는 갑작스러운 방문객 때문에 시끄러워졌다.

 

즈이호: (혹시 오와리 씨와도 관계가 있는 건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08. 성역 초소

초소 밖 공터. 카미카제급 구축함 아사나기는 웬일로 빗자루를 손에 들고 있었다.

 

즈이호 흉내를 내며 청소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생각은 온통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쏠려 있었다.

 

아사나기: ……하츠즈키!

 

아사나기는 목소리를 죽이고 건넛방 복도에 있는 하츠즈키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아사나기: 세 명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나가토 님하고 무사시 씨밖에 안 보이는 게야?

 

하츠즈키: 세 명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

 

아사나기: 뭐 좋다. 두 분이 여기 온 이유는 알고?

 

하츠즈키: 아사나기 씨. 엿들으면 안 돼!

 

하츠즈키는 문에 귀를 대려던 아사나기를 황급히 말렸다. 그 때 방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쟁반을 안은 즈이호는 방 안을 향해 가볍게 절했다.

 

즈이호: 무슨 일 있으면 즈이호를 불러줘!

 

그렇게 말하고 미닫이문을 닫았다.

 

즈이호: 후우…….

 

아사나기: 즈이호, 이쪽이다!

 

아사나기: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거라.

 

하츠즈키: 아사나기 씨! 일단은 즈이호가 숨 돌릴 틈 좀 주고!

 

즈이호는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는지 몸을 살짝 떨며 일행과 함께 별실로 향했다.

 

즈이호: 아으으…… 엄청 긴장했어…….

 

즈이호: 이렇게 가까이서 나가토 님과 무사시 씨를 보는 건 처음이야.

 

즈이호: 마음의 준비도 전혀 안 돼서 차를 따르다가 하마터면 쏟을 뻔했어.

 

즈이호: 후우…….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다…….

 

즈이호: 나가토 님은 엄청 심각한 표정이셨지만, 무사시 씨는 즈이호가 차를 쏟을 뻔했을 때 오히려 웃으면서 괜찮다고 해주셨어.

 

즈이호: 진짜 큰일 날 뻔했어.

 

아사나기: 그보다 즈이호. 두 분이 오와리에 대해선 뭐라고 하지 않았더냐?

 

즈이호: ? 나가토 님은 대신목에 간다고 그러셨는데.

 

아사나기: 대신목? 성역 안쪽에 있는 그 대신목?

 

아사나기의 손가락이 지평선 너머 보이는 거대한 나무 줄기를 가리켰다.

 

즈이호: 응 응.

 

아사나기: 설마 오와리는 거기에 있는 겐가? 그래서 하츠즈키가 찾지 못한 겐가?

 

하츠즈키: 대신목에는 왜 가시는 걸까.

 

즈이호: ! 맞다! 오와리 씨가 사라졌다는 말을 못 드렸어!

 

즈이호: 혹시 여쭤 보시면 어떻게 하지…….

 

세 사람의 대화는 갑작스런 무사시의 등장으로 중단되었다.

 

무사시: 걱정 마렴. 오와리는 지금 무사하단다.

 

무사시: 조만간 우리 일행이 이곳으로 데려올 거야.

 

하츠즈키: 무사시 씨?! , 그게.

 

무사시: 그렇게 조아릴 필요 없단다. 그보다 나가토 님께서 너희에게 맡기신 별도 임무가 있어.

 

무사시: 술식에 필요한 재료들인데, 번거롭겠지만 준비해 줄 수 있겠니?

 

무사시는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즈이호에게 건넸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인지 세 사람은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무사시: 너는 분명…… 하츠즈키였지?

 

하츠즈키: , 네엣!? 무사시 씨!

 

무사시: 그래. 아까 봤던 건 너였구나.

 

하츠즈키: , 죄송합니다! 무사시 씨가 이리로 오실 줄은 몰라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그 때 무사시의 뒤에서 "그런 게였구만."이라고 말하며 작은 그림자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아사나기: 나토리? 아니, 이 목소리는 히라누마?

 

아사나기: 어이쿠야! 손님을 영접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서 나토리를 깨우는 것을 깜빡했구나!

 

아사나기: 무사시 씨. 미안하네!

 

무사시: 괜찮아.

 

무사시는 뒤에 있던 나토리를 불러들였다.

 

무사시: 즈이호. 재료 준비는 부탁할게.

 

무사시: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 성역 이야기라도 해볼까?

 

 

 

 ~09. 완전 쩌는 악몽에서의 귀환?

어둠 속에서 얼마나 헤맸을까. 오와리 앞에 비로소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오와리: 으으응…….

 

수많은 환상? 과거?를 보아서 그런지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오와리는 손을 뻗어 뒤통수를 만졌다. 아무래도 다친 데는 없는 것 같다.

 

그나저나 몸이 계속 흔들렸다. 발이 땅에 붙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무언가에 허리가 잡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오와리: 이게 뭐야……. 바람? 매나 수리한테라도 잡혀버린 거야?

 

오와리: 대박. 눈도 못 뜨겠어.

 

오와리: 우와. 혹시 이게 스루가가 말했던 뭐였지나이트메어? 그런 거?

 

오와리: 근데 나 뭐하고 있었더라? 기억이 안 나네…….

 

머릿속 기억이 엉망이다. '자신의 기억'을 찾고 싶어도 잘 되지 않았다.

 

오와리: 맞다!

 

오와리: 나가토 님과 무사시 씨가 대신목에 있는 걸 봤어!

 

오와리: 그리고 뭐하고 싸우고 있는 거 같았는데? . , 아니다. 이건…….

 

오와리: 내 기억이 아니라 대신목이 기억하고 있는 옛날 나가토 님이구나.

 

오와리: ……근데 왜 이런 걸 보여준 거지? 게다가 "대신목으로 와라"라니 완전 대박 아냐?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오와리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잠시 후 매달린 느낌이 사라지고 흙과 초목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오와리: ……어디 착륙한 건가?

 

 

이윽고 시야가 회복되었다.

 

흐르는 강, 푸른 잔디밭, 연분홍빛 대신목의 모습이 보였다.

 

오와리: 돌아왔네? 진심 쩌는 악몽이었어..

 

오와리: 왠지 예감이 안 좋네. 얼른 초소로 돌아가야지.

 

 

 

 ~10. 술식

 

성역 초소. 방금 전.

 

무사시는 차를 쏟을 뻔한 즈이호를 진정시키고, 괜찮다며 방에서 내보냈다.

 

즈이호: 무슨 일 있으면 즈이호를 불러줘!

 

총총거리는 발소리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나가토와 무사시는 대화를 계속했다.

 

나가토: 일찍이 대신목이 어둠의 침식을 받았을 때, 짐과 그대, 그리고 대현자가 이 성역을 찾았다.

 

나가토: 대현자는 와타츠미의 힘을 이용하여 어둠과의 공멸을 꾀했으나, 짐과 그대 모두 그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지 못했다.

 

나가토: 짐은 어둠에 휩싸였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 만개한 대신목 아래로 돌아와 있었다.

 

나가토: 봉인 속에서 말라붙은 대신목은 모두 환상이었다는 말인가?

 

무사시: 그 때 대현자는 이렇게 말했어.

 

----

 

대현자: 잘 진행되어서 저와 어둠이 소멸한다면, 봉인도 필요없어질 것입니다.

 

----

 

무사시: 봉인은 아직 살아 있어. 즉 어둠은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는 거야.

 

무사시: 대신목의 침식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는 봉인 안으로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어.

 

무사시: ……혹은 봉인이 깨진다면 저절로 밝혀지겠지.

 

나가토: 적어도 지금까지는 초소에서 이상이 보고된 바는 없다.

 

나가토: 짐이 신목 속에서 잠들어 있을 때도 그 근원에서 대현자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했네만.

 

나가토: 결국 실패로 끝났지.

 

무사시: 시든 신목들이 회복될 기미는 안 보여.

 

무사시: 과거 우리가 대신목에 접근하지 못했던 것은 봉인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무사시: 하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봉인을 깨고 직접 상태를 확인할 수밖에 없겠네.

 

무사시: 그럼에도 걱정되는 것은.

 

무사시: 봉인이 사라지면, 갇혀 있던 부정의 그림자가 빠져나올 거란 사실이야.

 

나가토: 그러니 서둘러 현자 술식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야.

 

무사시: 현자 술식?

 

나가토: .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와타츠미초에는 봉인에 관한 술식이 기록되어 있네.

 

나가토: 짐은 일찍이 대현자가 이 술식을 사용했으리라고 생각해서 현자 술식이라고 부른 것뿐이야.

 

나가토: 무사시 그대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나가토: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출발 전에 미리 준비를 해두었지. 다만 술식의 일부 재료는 현지에서 조달할 필요가 있어.

 

무사시: 그럼 그 준비에 나도 협력할게.

 

나가토: 그대까지 나설 필요는 없네. 이것은 오와리를 비롯한 초소 아이들에게 맡기면 될 일이야.

 

나가토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방 안을 둘러봤다.

 

중앵풍으로 꾸며진 방에서는 군사 시설다운 분위기는 전혀 풍기지 않았다.

 

창밖으로 대신목이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지극히 평범한 방이었다.

 

나가토: ……. 그런데 오와리의 모습이 도통 보이지 않는군.

 

나가토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무사시: 나가토 님. 우선은 나에게 먼저 알려줘.

 

무사시는 선반에서 지필을 가져왔다.

 

그리고 나가토가 설명하는 술식의 재료를 단정한 자세로 종이에 적었다.

 

방에 먹물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후아아아암…….

 

나토리: 하츠즈키…… 즈이호……. 어딨어…….

 

미닫이문이 열리고 졸린 듯 눈을 비비고 있는 소녀가 나타났다.

 

그 옆에는 거울 같은 기묘한 것이 떠 있었다.

 

나토리: 킁킁. 즈이호가 우린 차다!

 

졸려 보이는 소녀는 비틀거리며 다가와 탁자 위의 찻잔을 집어 나가토 앞에 탁 놓았다.

 

나토리: 나도 한 잔 줘

 

히라누마: "무슨 생각인 게냐, 나가토 님 앞에서!"

 

당황한 나가토는 일단 찻잔에 차를 따랐다.

 

나토리: 맛있다~!

 

소녀는 개의치 않고 벌컥벌컥 차를 들이켰다.

 

찻잔을 내려놓은 후, 소녀는 겨우 잠이 깼는지 방에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나토리: , 하츠즈키……? 오늘 평소하고 좀 다르네?

 

나토리: 오와리도…… 하얘진 거 같은데……?

 

무사시는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붓을 내려놓았다.

 

무사시: 나가토 님. 이 아이는 나토리야.

 

나토리: , , , 나가토 님……!?

 

나토리는 눈을 몇 번 비비더니 빛의 속도로 뒷걸음질쳤다.

 

히라누마: "말했지 않느냐! 나가토 님 앞이라고!"

 

그만 엉덩방아를 찧은 나토리는 다시 빛의 속도로 사죄의 자세를 취했다.

 

나토리: 죄죄죄죄죄송합니다!!

 

무사시: 고개를 들려무나. 마침 너희에게 맡길 중요한 임무가 있었는데.

 

무사시: 나토리도 물론 도와줄 테지?

 

나토리: 무무무물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나가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찻잔에 새로 차를 따랐다.

 

나가토: 사전에 고하지 않고 찾아온 것이니 그대가 사과할 필요는 없다.

 

나가토: 무사시. 짐은 이제 술식 준비에 들어갈 터이니 재료는 맡기겠네.

 

나가토의 말을 몇 자 더 받아 적고 무사시는 종이를 말아 소매에 집어넣었다.

 

나토리를 향해 눈짓하자 나토리는 황급히 거울을 들고 무사시의 뒤를 따랐다.

 

복도 건넛방으로 향한 무사시는 미닫이문 앞에서 소녀들이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즈이호: ! 맞다! 오와리 씨가 사라졌다는 말을 못 드렸어!

 

즈이호: 혹시 여쭤 보시면 어떻게 하지…….

 

무사시는 문을 열고 귀여운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무사시: 걱정 마렴. 오와리는 지금 무사하단다.

 

무사시: 조만간 우리 일행이 이곳으로 데려올 거야.

 

 

 

 ~11. 깨진 봉인

???: "대신목의 성역으로 오십시오.

 

???: 대신목 밑에서, 여러분께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오와리: 나왔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부르는 목소리!

 

오와리: ……대현자?

 

문득 낯선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와리: 그치만 대신목에는 어호님의 결계가 있으니까. 가까이 갈 수 없는걸.

 

오와리: 그런데 어떻게…….

 

소리 내어 부정하자 문득 위화감이 오와리를 덮쳤다.

 

오와리: 어라? 혹시 꿈을 꾸는 건가? 어제는 대신목을 직접 손으로 만진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이후로 계속 악몽에 시달렸는데…….

 

쏟아져 나오는 기억의 모순에 두통을 느끼면서 그녀는 대신목 쪽으로 돌아섰다.

 

오와리: ―――!!!

 

대신목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뿌리부터 줄기까지 빛나기 시작했다.

 

수관에서 복잡한 모양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빛은 다시 사그라들었다.

 

점멸이 겨우 멎었을 때 성역 전체가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봉인이――깨졌다.

 

 

 

 ~12. 시들어버린 신목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성역은 짙은 구름에 휩싸였다.

 

하츠즈키: , 대신목이……!?

 

갑자기 일어난 이변에 모두가 놀라 밖으로 나왔다. 무사시는 선두에 서서 동료들을 진정시켰다.

 

무사시: 자전이여――!

 

뇌격이 구름을 가르며 무사시 주변에 떨어졌다.

 

섬광이 사라지자 무사시의 거대한 의장이 방어 자세를 갖추며 함선을 보호했다.

 

하츠즈키: 무사시 씨! 나가토 님이 아직 초소 안에――!

 

무사시: 나가토 님은 괜찮을 거야.

 

무사시: 지금은 봉인을 복구하는 것이 우선이야.

 

무사시: 부정의 그림자가 이 성역에서 빠져나가게 둘 수는 없어!

 

하츠즈키: 부정의 그림자」……?

 

검은 파도가 수평선 너머에서 밀려왔다.

 

검은 기운이 만들어낸 거대한 파도――도저히 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무사시: 내게서 떨어지지 말거라!

 

하츠즈키: 무사시 씨……!!

 

다가오는 거센 파도에서 칠흑의 짐승」――아니, 칠흑의 이 나타났다.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무사시를 집어삼켰다.

 

강한 충격파가 함선들을 덮쳤다. 마치 한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하츠즈키: 다들 자세를 유지해!

 

아사나기: 이게 무엇이더냐! 무언가가 우리를 빨아들이는 것 같네만!

 

하츠즈키: 아사나기 씨! 즈이호! 빨리 하츠즈키의 손을 잡아!!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즈이호: 으아아아아――!! 더는 안 돼――!!

 

하츠즈키: 즈이호――!!

 

난기류가 즈이호를 휩쓸었다. 즈이호는 순식간에 일행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사나기: ,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하츠즈키: 아무튼 뭔가를 잡아!!

 

하츠즈키는 나토리의 옷깃을 잡고, 다른 손으로 힘껏 아사나기의 발목을 잡았다.

 

세 사람은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서 서로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하츠즈키: 꽉 잡아!

 

나토리: , !

 

하지만 다음 순간, 거대한 힘이 세 사람을 성역의 중심부로 밀어넣었다.

 

즈이호: ……!?

 

아사나기: ………뿌리에서 무언가가……?

 

하츠즈키: ……대신목이완전히 시들었어……!

 

 

 

 ~13. 급선무

???: 으아아아아――――!?

 

???: 꺄아아아앗――!

 

기묘한 외침이 오와리의 귀에 들렸다.

 

오와리: 이 목소리는즈이호?

 

오와리:아니 아니, 위치적으로 그럴 리가 없잖아.

 

오와리: 그치만 머리 위에서 소리가 나는걸! 즈이호가 하늘을 날거나 그러지 않는 이상――

 

즈이호: 으아아아아아―――!?

 

즈이호: 오와리 씨―――!!!

 

오와리: …….

 

오와리: ……레알?

 

오와리: 에에엥!? 진짜 즈이호야?!

 

즈이호: 오와리 씨――! 도와줘어!!

 

오와리: 어떻게 날고 있는 거야!? 아니 날개가 있으니까 날수도 있는 건가……?

 

즈이호: 내려줘어어――!!

 

오와리는 적당한 무언가를 찾다가 의장에 달린 쇠사슬을 언뜻 보았다.

 

오와리: 그래, 의장! 이걸 쓰면! 에에에에잇!!!

 

오와리는 맨손으로 쇠사슬을 뜯었다.

 

그리고는 올가미를 만들어 유니온 영화에 나오는 카우걸처럼 즈이호를 향해 던졌다.

 

오와리: 꽉 잡아!

 

무사히 즈이호를 잡았지만, 관성으로 인해 두 사람은 정면으로 부딪혔다.

 

오와리: 아야!

 

즈이호: …….

 

즈이호: 으으, 으에에엥.

 

즈이호: 오와리 씨, 오와리 씨!! 으아아아앙――!

 

오와리 위로 넘어져 다행히 무사했던 즈이호였지만, 일어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즈이호: 무서워………….

 

즈이호: 무사시 씨. 무사시 씨가…….

 

오와리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래도 그들이 밟고 있는 땅은 공중에 떠올라 일종의 섬이 된 것 같았다.

 

오와리: 무사시 씨가 왜? 여기 왔어?

 

평소 냉정 침착하다고 말하기는 힘든 즈이호였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묻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지만 지금은 일단 미루고 안전한 장소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

 

오와리: 에이, 울지 마. ?

 

오와리: 일단은 안전한 곳을 찾자! !

 

오와리: 어려운 건 나중에 생각하고!

 

훌쩍이는 즈이호를 들쳐 안고 오와리는 중심부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14. 허공 항행

한편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하츠즈키, 아사나기, 나토리 세 사람은 아직도 정체불명의 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더는 검은 은 보이지 않았지만 힘의 탁류로 인해 도무지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다.

 

자세를 바꾸려고 몸을 움직이자 발끝이 무언가 부드러운 표면에 닿았다.

 

나토리: 밑에 뭐가 있어!

 

밑을 보니 캄캄한 공동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발끝이 닿은 곳에 파문이 일고 있었다.

 

수면에는 밤하늘처럼 빛의 알갱이가 수놓아져 있었다. 모두는 허공 위로 천천히 내려왔다.

 

아사나기: 촉감이 이상한데.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구나.

 

나토리: 폭신폭신해. 이불 같아.

 

아사나기: 가만히 서 있으면 가라앉는 것 같다만…….

 

하츠즈키: 아사나기 씨. 나토리. 같이 일렬로 서서 의장을 전개해 보자.

 

하츠즈키: 천천히 가속하는 거야.

 

나토리: 어떻게 된 거야?

 

하츠즈키: 몰라.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할 때도 아니고.

 

하츠즈키: 얼른 즈이호를 찾아야 돼. 그리고 무사시 씨도…….

 

아사나기: 무사시…….

 

아사나기: 그래! 그런 괴이 따위가 무사시 씨의 상대가 될 리가 없지!

 

아사나기: 어쩌면 벌써 녀석의 목을 베었을지도 모르는 법이야!

 

하츠즈키: …….

 

하츠즈키: , 통신기 있었지.

 

하츠즈키: 한 번 불러 볼까? 버튼을 누르고.

 

지지직―――

 

――――!!

 

어느새 검은 기운이 세 사람 앞까지 다가왔다.

 

고정된 형체가 없는 그것은 양산형 세이렌 같기도 했고, 세 사람의 그림자 같기도 했다.

 

어둠은 수시로 모습을 바꾸며 엄습했다.

 

일행은 무기를 들고 전투를 준비했다.

 

하츠즈키: 지금은 우리들끼리 싸울 수밖에 없어!

 

하츠즈키: 간다!

 

 

 

 ~15. 고전

하츠즈키: 하아아압――!

 

칼이 어둠을 갈라 기세를 잠시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적들은 곧 다시 형체를 바꾸어 공격해 왔다.

 

아사나기: 이놈들은 대체 무엇이더냐!

 

사방이 포연과 먼지로 자욱했다.

 

하츠즈키: 이야아압――!

 

하지만 이번 일격은 막혔다.

 

하츠즈키: 딱딱하잖아?! 안개 같은 거 아니었어!?

 

칼날이 닿는 순간 어둠은 순식간에 물질적 특성을 바꾸었다.

 

띠잉!!!

 

매끄럽고 단단한 표면을 내리친 것처럼 칼이 튕겨져 나갔다.

 

하츠즈키: 이런……!

 

나토리: 우리 포위됐어!

 

아사나기: 이 해충들이! 지금 당장 이 주먹으로 두들겨주마!

 

아사나기: 어뢰! 주포! 일제 발사!

 

하츠즈키: 아사나기 씨, 진정해!

 

하츠즈키: 탄약이 얼마 안 남았어! 기회를 봐서 돌파구를 찾자!

 

아사나기: 지금 다른 돌파구가 어디 있느냐!

 

아사나기: 신호탄! 신호탄을 쏘자꾸나!

 

아사나기: 어쩌면 다른 일행하고 합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토리: 내가 할게!

 

나토리는 포구를 하늘을 향하게 하고 신호탄을 쐈다.

 

하늘에서 빛나는 신호탄의 빛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유일한 별이 되었다.

 

아사나기: . 탄약이 다 떨어져 가는구나!

 

하츠즈키: 마지막 빛이 사라질 때까지…….

 

하츠즈키: 끝까지 싸울 거야!

 

 

 

 ~18. 빛 속에서

아사나기: 크윽……!?

 

아사나기: 탄약이…….

 

하츠즈키: 아사나기 씨, 탄약 다 썼어?

 

아사나기: 그래. 허나 이 아사나기. 주먹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느니라!

 

하츠즈키: 나토리는 위험하니까 뒤에 숨어 있어.

 

하츠즈키: 최악의 경우 한 사람이라도 탈출해야 돼.

 

나토리: 무슨 소리야! 나도 모두를 지킬 거야!

 

하츠즈키: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알아!? 적당히 해!

 

아사나기: 자 자 다들 그쯤 하거라!

 

날아드는 공격을 의장의 현측 장갑으로 막아냈다. 세 사람은 등을 맞댔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하츠즈키: 아무래도 여기까진가봐…….

 

그럼에도 그들은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검은 기운은 일제히 가속하여 세 사람을 삼키려 했다.

 

하츠즈키: …….

 

하츠즈키: ………….

 

마치 조명을 받은 듯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아사나기: 어찌 된 것이지……?

 

나토리: 저기 봐! 다들 겁먹고 도망치고 있어!

 

하늘에서 내려온 빛을 맞고 검은 기운은 비명을 지르며 소멸했다.

 

나토리: 따뜻해.

 

나토리: 혹시 나가토 님의 술식인가?

 

빛은 점점 퍼져나가 세 사람을 덮었다.

 

어째서인지 빛 너머로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토리: 이거 설마 전송 마법――?!

 

다음 순간, 눈부신 빛이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17. 안전한 정원

 

중앵풍 정원 중앙에서 세 사람은 서로 어색하게 마주보고 있었다.

 

하츠즈키: …….

 

아사나기: …….

 

나토리: …….

 

나토리: 우리살아 있는 거지?

 

하츠즈키는 갑자기 옆에 있는 아사나기의 팔뚝을 꼬집었다.

 

아사나기: 뭐하는 짓이냐!

 

하츠즈키: 꿈은 아닌가봐!

 

아사나기: 확인하려면 자기 볼을 꼬집는 게 아니더냐!

 

하츠즈키: 그치만 아프잖아. 마침 팔도 옆에 있고…….

 

아사나기: 이 무슨 궤변일꼬!

 

나토리: 둘 다 멈춰봐.

 

나토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토리: 대체 여긴 어디지?

 

나토리: 혹시 중앵 본섬으로 돌아온 건가?

 

하츠즈키: 글쎄. 정원 모습을 보면 중앵은 확실한데, 근데 왠지 낯이 익은걸?

 

하츠즈키: 뭔가나가토 님 저택의 정원?

 

나토리: 그럼 역시 나가토 님이 구해주신 거야?

 

아사나기: 일단은 주변을 살펴보자꾸나. 여기 가만히 있어 봤자 입만 아플 뿐이니까.

 

아사나기는 팔을 주물럭거리며 걸어가려고 했다――

 

???: 안 됩니다.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서자, 연못가에 하얀 옷을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수면에 비친 그 얼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낙낙한 옷을 입고 있음에도 유려한 곡선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대현자: 여기서 반걸음만 내딛어도 끝없는 심연에 빠집니다.

 

아사나기는 발밑을 보았다. 확실히 이 앞은 지금 서 있는 곳과 분위기가 달랐다.

 

다행히 발을 들여놓지는 않았지만, 경계 너머로 오한마저 느껴졌다.

 

소름이 돋은 아사나기는 서둘러 다리를 거두었다.

 

아사나기: 자네는……?

 

나토리: 엄청 예쁜 사람이다…….

 

나토리: 신선……?

 

일행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 그녀는 천천히 걸어왔다.

 

대현자: 하나, , ……. 그렇군요. 아직 다른 동료가 저 안에 갇혀 있는 것 같네요.

 

그녀는 일행을 이끌고 연못으로 다가갔다. 잔잔하던 연못은 갑자기 시커먼 공간으로 변했다.

 

마치 나락으로 통하는 심연과도 같았다.

 

그녀는 발밑의 심연을 가리켰다.

 

대현자: 동료를 찾았습니다. 괜찮아요. 무사합니다.

 

심연 속에 작은 빛이 반짝였다.

 

이내 빛도 심연도 사라지고, 연못은 다시 고요하게 일렁였다.

 

 

 

 ~18. 감시자

 

한편 즈이호를 구출한 오와리는 보이지 않는 허공을 항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두 사람은 떠 있는 땅덩어리에서 벗어나 검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나지막한 언덕 뒤로 숨었다.

 

즈이호는 울음을 그쳤지만 눈은 아직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즈이호: 대신목이 시든 꿈을 꿨다고 훌쩍 확인하러 가버리다니 너무해!

 

즈이호: 즈이호도 하츠즈키도 다 있었는데 먼저 같이 상의했어야지!

 

오와리: 미안!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 테니까 용서해줘!

 

즈이호: ……정말 반성했어?

 

오와리: 네에~ 반성했어요~

 

즈이호: 하나도 안 했잖아! 오와리 바보!

 

오와리: 쏘리 쏘리 진짜로 반성했어!

 

오와리: 그보다 나가토 님과 무사시 씨가 여기 왔다고 했지? 지금 어디 있어?

 

즈이호: 나가토 님은 초소에서 술식 준비를 하고 계셨어.

 

즈이호: 무사시 씨는 우리하고 같이 술식 재료를 모으고 있었는데.

 

즈이호: 근데 갑자기 대신목이 시들어 버려서…….

 

오와리: 술식 재료, 시들음…….

 

오와리: 그거네! 그러니까, 결계? 봉인?이 사라진 걸 봤거든!

 

오와리: 봉인이 사라져서 안에 있던 검은 기운 같은 게 뛰쳐나온 거야!

 

오와리: 오히려 봉인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거야.

 

오와리: 나가토 님이 초소를 설치했을 때 결계를 강화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 있는데.

 

오와리: 역시 그걸로는 부족했던 걸까. 어렵네.

 

오와리: 근데 그럼 무사시 씨는 같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즈이호: 봉인이 깨지고 무사시 씨는 우리를 지키려다 어둠에 휩싸여 버렸어…….

 

오와리: 엑 레알? 으으음. 암호 채널에도 응답이 없네…….

 

즈이호: 암호 채널?

 

오와리: 아아 전에 이쪽으로 배치가 정해졌을 때 키이가 무사시 씨와 연락할 수 있는 비밀 회선을 알려줬거든.

 

오와리: 그래서 가끔씩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무사시 씨한테 알려주고 그랬어.

 

즈이호: 흐응. 오와리 씨는 그런 것도 받았구나? !

 

오와리: 아니 나는 그냥 어쩌다 받은 거고.

 

오와리: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오와리: 하츠즈키네하고도 떨어졌고, 무사시 씨는 소식 불명이고.

 

오와리: 무엇보다 성역이 이렇게 변하다니…….

 

오와리: 즈이호. 함재기 띄울 수 있어?

 

오와리: 우리끼리 아웅다웅하는 것보다 역시 함재기로 모두를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해서.

 

즈이호: ! 즈이호한테 맡겨줘!

 

오와리: 그리고…….

 

언덕 뒤로 몸을 내밀어 주위 상황을 살폈다.

 

즈이호: 안 돼. 방향도 못 잡겠어.

 

즈이호: 탐색 범위를 더 넓혀 볼게!

 

 

 

 ~19. 생존자

어둡고 차가운 봉인 속에서 부정의 그림자가 계속해서 비명과 포효를 질렀다.

 

대신목이 떠오르면서 산산조각 난 땅덩어리들을 누비며 생존자를 찾는다.

 

대현자: ………….

 

신호탄의 빛을 확인한 그녀는 싸우고 있던 세 사람을 발견했다.

 

빛줄기가 세 사람을 감쌌다. 멀리 시든 대신목에서 빛이 몇 번 반짝였다.

 

대현자: 생존자는 무사히 이송되었습니다.

 

대현자: 다음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몇 차례 익숙한 굉음이 그녀의 경계심을 부추겼다.

 

대현자: 함재기?

 

어둠 속에서 간신히 함재기 한 대가 비행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내 통제를 잃고 추락했다.

 

대현자: 날아온 방향은저쪽이군요.

 

그녀는 검은 수면에 내려앉은 후 전방을 향해 항행을 계속했다.

 

----

 

즈이호: 함재기가 또 연락이 두절됐어!

 

즈이호: 으으이제 남은 애가 없어…….

 

오와리: 쉽지 않네. 위험하지만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겠어.

 

오와리: 그 전에――우선은 눈앞의 장애물부터 치워볼까!

 

즈이호: , 누가 접근하고 있어!

 

오와리: 멋지게 날려버려줄게! 즈이호, 방향은?

 

즈이호: 우리 6시 방향!

 

오와리: 뒤쪽이야!?

 

오와리는 황급히 주포를 움직여 뒤를 향했다.

 

오와리: 발사――!!

 

―――――!!!

 

무언가에 포탄이 가로막히면서 연기와 먼지가 사방으로 퍼졌다.

 

???: 콜록콜록.

 

오와리: ……사람?!

 

???: 거친 환영이네요. 후후후.

 

그녀는 칼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칼날에는 옅흔 탄흔이 남아 있었다.

 

즈이호: 미안해!

 

오와리: ……미안한데 누구야?

 

머릿속에 대신목에 접근했을 때 나타난 환상이 다시 떠올랐다.

 

오와리: ……대현자?

 

대현자: 동료들은 이미 안전한 곳으로 옮겼습니다. 두 분도 속히 이동하십시오.

 

대현자: 그곳은 이 공간의 마지막 정토입니다. 제 남은 힘으로 모두를 지켜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나자 하늘에서 내려온 빛줄기가 오와리와 즈이호를 감쌌다.

 

하지만 빛줄기는 몇 번 번쩍이더니 아무 일도 없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즈이호: ……무슨 광신호야?

 

대현자: (역시 거리가 멀수록 소모가 심하군요.)

 

대현자: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대현자: 따라오십시오.

 

 

 

 ~20. 심연 탈출

대현자: 즈이호. 항공 지원을 부탁합니다.

 

즈이호: 알겠어!

 

즈이호: 전투용 아이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부탁해!

 

대현자: 거리가 벌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세 사람은 무형의 바다를 지나 신목의 가지에 있는 빛에 다가갔다.

 

오와리: 저기 내가 잘못 본 거면 미안한데 가지에 있는 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거 같지 않아?

 

즈이호: 오와리 씨! 조심해!

 

오와리는 적이 쏜 포탄을 피하다가 균형을 잃을 뻔했다.

 

오와리: 우왓! 주변이 온통 적이야!

 

즈이호: 그 너머로도 더 있어. 포위당했어!

 

대현자: ……어둠이 노리는 것은 저입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칼집에서 칼을 빼들자 차가운 빛이 다가오는 어둠의 발을 묶었다.

 

대현자: 이 거리면 충분할 것 같군요.

 

즈이호: 뭐하게?

 

대현자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오와리와 즈이호의 머리 위에 빛줄기를 소환했다.

 

두 사람이 완전히 빛에 휩싸이자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인사를 마친 그녀는 발길을 돌려 어둠의 군세에 단신으로 돌입했다.

 

 

 

 ~21. 갈라진 하늘

하츠즈키 일행이 있는 정원.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사나기: 지진?

 

하츠즈키: 지진이 아냐! 하늘을 봐!

 

맑은 밤하늘에 갑자기 균열이 생겼다.

 

안에서 검은 기운이 쏟아져 이 공간을 침식하려 하고 있었다.

 

대현자: 때가 되었군요.

 

대현자 주변으로 푸른빛 나비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토리: 어이~!?

 

하츠즈키: 나토리, 얼른 피해!

 

아사나기: 이것들이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이냐!?

 

균열은 계속 커지면서 검은 기운을 내뿜었다. 탄약이 바닥난 일행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나토리: 아까 언니는 어디 간 거야?

 

대현자가 사라진 자리에 빛줄기 하나가 내리꽂혔다.

 

아사나기: 또 누가 전이되는 건가! 우와앗!

 

갑자기 저쪽에서 포격이 날아들었다.

 

오와리: 이게 잘도 피하네!

 

아사나기: 위험하잖나! 제발 상대를 좀 잘 보면서 쏘게!

 

빛이 사라지자 비로소 서로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아사나기: 오와리! 즈이호!

 

아사나기: 이놈들 잘도 무사했구나! 걱정이나 끼치고!

 

오와리: 아사나기 씨! 왜 다들 여기 있어?! 근데 여기 어디야?!

 

하츠즈키: ‘안전한 정원이라고 하더라구. 뭐 더는 안전하지 않은 거 같지만.

 

하츠즈키: 일단은 여기 적들을 해치우자!

 

아사나기: 해치울 수 없으니까 이리로 온 것 아니냐! 아까 그 사람이 뭔가 빛을 내렸을 때는 어떻게든 됐었는데.

 

아사나기: 이젠 없다!

 

오와리: 아까 그 사람? 혹시 하얀 머리에 하얀 옷을 입고 있었어?

 

아사나기: 그렇다만?

 

오와리: 역시 대현자였구나!

 

오와리: ? 근데 그 사람이 너희도 도와줬던 거야?

 

오와리: 분명 우리하고 같이 있었는데.

 

아사나기: 하아? 그 사람이 사실은 두 명이라는 말이더냐?

 

오와리: 그건 아냐! 내가 실수로 포격을 했었는데 대현자가 막았었거든.

 

오와리: 분명 실체가 있었어. 환각 같은 게 아냐!

 

하츠즈키: 그럼 이 정원에 있었던 쪽이 환각이라는 거야?

 

아사나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동시에 환각을 보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나토리: 그치만 아까 언니가 사라졌던 모습 보면 뭔가 신기하지 않아?

 

나토리: 꼭 신선 같았어!

 

나토리: 신선이니까 분신도 만들 수 있겠지!

 

하츠즈키: ……이젠 아무래도 좋아.

 

하츠즈키: 아무튼 이 정원까지 들어온 검은 기운을 처리해야 돼.

 

 

 

 ~22. 현자 술식

검은 용에 삼켜진 무사시는 어둠 속에서 한참을 헤매고 있었다.

 

무사시: …….

 

낯익은 빛이 눈앞에 나타나 무사시를 감쌌다.

 

빛 속에서 무사시를 향해 뻗은 손이 보였다.

 

무사시: 나가토 님?

 

나가토: 늦어서 미안하구나.

 

나가토: 다른 아이들은 어디 있는지 아느냐?

 

무사시: 아니. 하지만 만약 대현자의 봉인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면.

 

무사시: 그 아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단 하나야.

 

나가토: 대신목…….

 

무사시: 내가 그리로 가서 찾아보고 올게.

 

나가토: . 조만간 술식이 발동되니 나는 움직일 수가 없다.

 

나가토: 무사시……. 그 아이들 쪽은 그대에게 맡기마.

 

나가토: 이 부적을 가져가거라.

 

나가토: 아이들을 찾으면 부적을 불태우거라. 짐이 감지하면 바로 술식을 발동하겠다.

 

나가토: 부정의 그림자의 탈출을 막으려면 현자 술식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나가토: 하지만 짐은 그 술식을 오래 유지할 수 없어.

 

나가토: 그러니 때를 잘 노려야 하니라.

 

무사시: 나가토 님. 그게 무슨 말이야?

 

나가토: 현자 술식을 통해 짐은 그대들을 이곳에서 전송할 수 있다.

 

나가토: 전송이 끝나면 봉인 강화를 시도할 것이야.

 

나가토: 다만…… 짐의 여력이 끊어지기 전에 반드시 대현자를 찾아야 하네.

 

나가토: 아마 그녀의 힘도 얼마 남지 않았을 터이니.

 

 

 

 ~23. 인도

정원――대현자가 남긴 안전 구역에 위기가 닥쳤다.

 

봉인이 깨진 지금 어둠의 힘이 점점 강해져 신목의 마지막 정토를 침범하려 하고 있었다.

 

어둠이 높이 떠 있는 달을 가리우고 있었다.

 

하츠즈키: 월식……?

 

일행은 다시 심연이 된 연못가로 모였다.

 

오와리: 균열이 아직도 점점 커지고 있어!

 

순식간에 밤하늘은 대부분 검은 기운에 뒤덮이고 말았다.

 

응화된 기운은 함재기나 까마귀의 형태로 변해 어지러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와리: 다들 내 뒤로 숨어!

 

하츠즈키: 오와리 씨. 탄약은 얼마나 남았어?

 

오와리: 좀 있어! 당분간은 괜찮아!

 

오와리: 너희는? 싸울 수 있겠어?

 

하츠즈키: 물론!

 

아사나기: 나도 마찬가지다!

 

오와리: 나토리는 즈이호를 지켜줘! 가자, 일제 사격!

 

주포가 명동했다. 천둥소리 같은 울림이 정토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진정한 천둥소리가 균열 속에서 울려 퍼졌다.

 

자전은 균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날뛰는 어둠을 전부 격퇴했다.

 

뇌광이 몇 번인가 빛났다. 그리고――

 

오와리: 무사시 씨?

 

자전이 떨어져 정원에 박혔다.

 

조금 전까지 짙은 어둠으로 가득 찼던 공기가 단숨에 맑아지고, 검은 기운마저 폭풍 속에 흩어졌다.

 

균열이 아물고 어둠은 다시 그 틈새로 모조리 빨려나갔다.

 

폭풍우가 잠잠해지자 무사시가 일행 앞에 나타났다.

 

오와리: 역시 무사시 씨다!

 

무사시: 오와리, 즈이호, 아사나기, 하츠즈키, 나토리.

 

무사시: ……….

 

무사시: 다른 사람은 더 없니?

 

오와리: …… 맞다!

 

오와리: 환상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현자가 우리를 구해주고 사라졌어!

 

무사시: 과연. 역시 대현자는 건재한 것 같군.

 

무사시: 잘 들으렴. 너희가 방금 만난 사람은 바로 중앵 대신목의 수호자야.

 

무사시: 몇 년 전 이변이 일어났을 때 나와 나가토 님은 대현자와 함께 싸웠었어.

 

무사시: 하지만 대현자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봉인 밖으로 내보냈지.

 

무사시: 그 후 대현자를 구출하고 어둠을 제거할 방법을 찾으면서 봉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나가토 님은 성역에 초소를 설치했어.

 

무사시: 다만 대현자가 펼친 봉인은 너무 강력해서 나가토 님도 일부 보강하는 것 외에는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었지.

 

오와리: 그러니까 나가토 님이 초소를 설치한 건…….

 

오와리: 명목상으로는 성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실은 봉인의 상태를 살피기 위한 거였구나.

 

오와리: ……생각해 보면 이전의 이상한 상황들이 사실 봉인이 풀릴 조짐이었을지도.

 

하츠즈키: 무사시 씨. 괴물한테 먹혔었잖아. 지금은 괜찮아?

 

무사시: 지난 대전 이후로 내 의장은 특별히 강화되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단다.

 

무사시: 다들 가까이 오렴. 나가토 님께서 이걸 주셨어.

 

하츠즈키: 이건……?

 

즈이호: 나가토 님의 부적이다!

 

무사시: 그래. 얼른 사용하렴.

 

무사시는 하츠즈키에게 부적을 건넸다.

 

하츠즈키가 부적을 잡자 부적 끝에서 불길이 치솟아 순식간에 불타버렸다.

 

하츠즈키: ………….

 

하츠즈키: 무사시 씨? 이거 괜찮은 거야?

 

하츠즈키: 하츠즈키 딱히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어디 잘못된 거 아니지?

 

하츠즈키: 으으. 나가토 님의 소중한 부적을 태워버리다니.

 

하츠즈키: 망했어.

 

무사시:아니. 술식은 이미 작동했어. 이제 나가토 님은 우리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거야.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전송 신호다.

 

무사시: “모든 힘을 소모하여 껍데기가 될 테지만, 그럼에도 중앵의 미래를 바꾸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무사시: 그러면 그 빈 껍데기, 내가 받아가겠어――

 

 

 

 ~24. 염원

두 사람은 순백의 공간에 서 있다.

 

대현자: 소멸이란 모든 것을 허무로 되돌리는 것.

 

대현자: 천지의 혼합도, 음양의 조화도 아닌, 단어 그대로 인멸이 됩니다.

 

대현자: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대현자: 그것이 와타츠미」――당신과 저의 종국입니다.

 

대현자: 아니, 처음부터 우리는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군요.

 

대현자: 사람의 염원을 짊어지고 태어난 저. 사람의 염원을 이루어주는 당신. 구성된 본질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대현자: 제 말이 맞습니까?

 

………. :대현자

 

대현자: 그날 밤, 정원에서 만났던 분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저는 수많은 세계의 파멸을 보아왔습니다. :대현자

 

그리고 마침내 유일한 가능성을 깨달았습니다. :대현자

 

인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대현자

 

저는 언제나 알고 있습니다. :대현자

 

대현자: 이해합니다.

 

그것은 이미 확정된 저의 종국입니다. :대현자

 

운명을 직시하는 결심이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대현자

 

대현자: 진실로 결심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저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현자: 제가 사랑하는 이 세계의 햇살을, 사계절을 느끼고 싶어요.

 

대현자: 사람들이 웃는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대현자: 벚꽃 흩날리던 그 비오는 밤, 아름다운 세상에 몸을 맡기고

 

대현자: 달빛 아래에서――다시 한 번 그 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대현자: 그렇기에 저는 이곳에서 기다립니다.

 

대현자: 저의 시간을 이곳에 고정하고, 불가능한 기적을 기다립니다.

 

대현자: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대현자: 저는…….

 

이제 충분합니다 :대현자

 

……그 아이들은 봉인에서 빠져나왔습니까? :대현자

 

……. :대현자

 

그렇다면 좋습니다. :대현자

 

제 결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대현자

 

 

 

 ~25. 인멸

첫 번째는 베기. 어둠으로 이루어진 구름을 떨쳐내고 그녀는 훌쩍 뛰어올랐다.

 

두 번째는 찌르기. 칼을 적의 중심부에 찔러 무산시켰다.

 

다시 뭉친 어둠은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같은 모습, 같은 존재감을 내뿜는 부정의 그림자.

 

대현자: …….

 

세 번째는 휩쓸기. 양자의 검이 엇갈려 불꽃을 튀겼다.

 

네 번째는 거합. 반걸음 물러서 칼을 칼집에 넣었다.

 

그림자가 틈을 보인 순간 발도하여 무방비 상태의 몸을 갈랐다.

 

대현자: ――――!!

 

칼을 휘둘러 어둠 속 초승달을 갈랐다.

 

흩어진 그림자 속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전부 헛수고야――

 

그림자는 무수한 군세를 이루어 사방에서 공세를 퍼부었다.

 

…….

 

그녀는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림자의 군세는 피할 새도 없이 서로 부딪혔다.

 

운학의 소매를 휘날리며, 그림자의 추격을 피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전부 헛수고야――

 

그림자가 오가며 생긴 빈틈으로 붉은 빛을 발하는 핵을 발견했다.

 

대현자: 찾았습니다.

 

순간 가속하여 칼끝을 돌렸다.

 

대현자: ――인멸하라.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 붉은 빛을 찔렀다. 하지만 칼은 핵에 닿기 전에 멈췄다.

 

대현자: 이것은…….

 

그림자의 상처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부정의 그림자는 두 손으로 칼날을 잡고 으르렁거렸다.

 

대현자: 나의 종국…….

 

그림자에서 더 많은 팔이 뻗어 나와 칼날을 움켜쥐고 잡아 빼내려 했다.

 

――――!!!!

 

칼이 부러지고 검은 충격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허망하게 떠다니는 땅덩어리 위로 추락했다.

 

붉은 핵은 다시 어둠에 감싸여 거대한 괴물의 형상을 이루었다. 괴물은 포효하며 커다란 입을 벌렸다.

 

대현자: …….

 

 

 

 ~26. 운젠

 

왜 아직 이곳에 있습니까? :대현자

 

대현자: 몇 번을 소멸하더라도, 저는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대현자: 저는 와타츠미」――당신이니까요.

 

대현자: 제게 모든 것을 넘겨주십시오.

 

아뇨……. :대현자

 

이것은 저만의 사명.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대현자

 

대현자: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수많은 가지를 보았습니다. 그 모든 세계의 파멸이 마침내 제가 옳다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대현자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국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대현자

 

헛된 수고를 버리고 하나뿐인 길을 따라 종국으로 향하는 것이 낫습니다. :대현자

 

대현자: …….

 

대현자: 그렇습니까.

 

대현자: 모든 것을 짊어지고 희생하는 것은 고귀한 일입니다.

 

대현자: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대현자: 초연한 존재를 연기하며 신의 흉내를 낸다 한들 구원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대현자: 저와 당신은 방관자가 아니라 이 세계의 일원……. 한 톨의 모래알일 뿐입니다.

 

대현자: 설령 모든 노력이 헛수고일지라도.

 

대현자: 설령 피할 수 없는 파멸이 찾아올지라도.

 

대현자: 저의 발자취가, 운명에 항거하려는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증명이 될 테니까요.

 

그녀는 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현자: 저의 힘이 되어주십시오.

 

대현자: 본디 하나된 존재로서.

 

대현자: 파멸의 재앙을 불태웁시다.

 

지금까지 그녀의 눈빛이 이토록 확고했던 적은 없었다.

 

엇갈려 날아가는 두 나비가 서로 겹쳐 두 사람 주위를 맴돌았다.

 

이윽고 그곳에 사람의 형상은 오직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시키가미의 용이 그 거구를 둥글게 말았다.

 

마치 거꾸로 매달린 나비의 번데기처럼.

 

시키가미 용의 사이로 빛이 새어나왔다――

 

 

순백의 공간 속――

 

의장을 두른 순간 수많은 추억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스쳐지나간 시간들이 눈앞에 맴돌았다.

 

차가운 금속은 자신을 구성하는 몸의 일부로서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

 

운젠: 이것이 나의 의장.

 

운젠: 나의 이름은――운젠.

 

대현자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봉인되었던 의지가, 마침내 온전해졌다.

 

운젠: ………….

 

운젠: 이 힘은…….

 

시키가미 용은 천천히 떠나가고 그녀 앞에 낯선 손님이 나타났다.

 

시만토: 대현자.

 

시만토: 나는 시만토야. 무사시의 명령으로 이 의장을 가져왔어.

 

시만토: 너는 네 의장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들었어.

 

시만토: 지난 실패 이후로 무사시는 네가 부탁한 것을 열심히 연구했어.

 

시만토: 그 결과 시나노의 몸 상태도 호전되었고, 운젠이라는 개념으로 너를 위한 의장을 만들 수 있었어.

 

시만토: 이 의장이 있다면 개념은 확고해질 거야. 더 이상 봉인에 얽매이지 않아도 돼.

 

시만토: 나가토 님과 무사시를 따라 성역에 온 이후로 계속 너와 접촉할 기회를 찾고 있었어.

 

시만토: 그러다가 대신목 근처에 쓰러진 오와리를 발견했고, 이후로 상황이 급변해서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어.

 

시만토: 늦어서 미안해.

 

운젠: 시만토, 였죠?

 

운젠: 한 가지 정정해드리겠습니다. 지난번 싸움에서 나가토 님과 무사시 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운젠: 왜나하면.

 

운젠: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시만토: 그래. 대현자.

 

운젠: 방금 운젠이라고 하셨었죠.

 

운젠: 그러니앞으로는 운젠으로 불러 주세요.

 

운젠: 이 마지막 싸움에서,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시만토: 당연하지!

 

 

 

 ~27. 이부키

 

시만토: 용신의 힘을 보아라!

 

시만토는 검은 용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시키가미 용은 스스로의 몸을 방패 삼아 날렵하게 움직이면서 허무의 바다를 달리는 운젠을 보호했다.

 

종이로 보이는 몸체였지만 그림자의 공격을 받아내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시만토: 운젠, 지금이야!

 

운젠: 포격 개시――!

 

맹렬한 포화가 부정의 그림자에게 묵직한 일격을 가했다.

 

시만토: 부정들이 몰려오고 있어!

 

부정의 그림자가 변화한 이형의 용은 그 세 개의 머리를 점점 키워가고 있었다.

 

검은 공간 속에서도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의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시만토: 반응이 없어. 그렇다면!

 

포탄은 그림자의 맹위에 비해 기세가 너무 약했다.

 

방금 공격에 자극받았는지, 부정의 그림자는 목을 불쑥 빼어들어 함선들을 덮쳤다.

 

순식간에 행해진 공격이라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시만토: ……!?

 

시키가미는 그림자에 닿는 순간 와해되었다.

 

전부 헛수고야――

 

???: ………!

 

???: 악귀 퇴산――!

 

긴 칼 한 자루가 들이닥치는 송곳니를 막아냈다.

 

이부키: 크윽……!?

 

이부키: 두 분께서는 일단 물러나세요!

 

기세 좋게 용의 목을 받아넘겨 발밑의 땅덩어리에 처박았다.

 

시만토: 너는……!

 

검은 용이 땅덩어리를 부수고 이부키의 모습은 낙석과 부스러기에 의해 가려졌다.

 

간신히 피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봤다.

 

시만토: 운젠. 저 그림자를 쓰러트릴 방법은 없어?

 

생각에 잠긴 운젠은 이내 의장을 해제했다.

 

의장은 빛나는 나비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운젠: 용신님. 부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시만토: . 말만 해.

 

운젠: 이 최후의 일격이 중앵, 나아가 이 세계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입니다.

 

운젠: 만전을 기하기 위해 최대한 부정의 그림자의 핵에 접근하겠습니다.

 

운젠: 그러기 위해선…….

 

시만토: 알았어, 운젠. 더 말하지 않아도 돼.

 

시만토: 핵으로 가는 길은 이 시만토가 열어줄게!

 

 

 

 ~28. 하늘의 등

 

성역 바깥.

 

중앵. 나가토의 거처.

 

새벽이 밝아오자 무츠는 지시대로 품에서 금낭을 꺼냈다.

 

금낭 안에는 작은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나가토의 전언 몇 줄이 적혀 있었다.

 

무츠: ……!!

 

카와카제: 무츠 님. 어디 가십니까?

 

무츠: 나가토 언니를 도와야 해! 카와카제도 얼른 준비해!

 

무츠: 지금 바로 등불을 밝혀야 돼!

 

 

잠시 후 거대한 등불이 천천히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새벽이 가기 전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났다.

 

무사시의 거처――당직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던 사카와는 공중에 떠오른 등불을 보았다.

 

곧이어 그녀는 황급히 아래층으로 뛰어갔다.

 

사카와: 도성의 등불이 켜졌어요!

 

놀란 채로 뛰어들던 사카와는 문간의 키이와 마주쳤다.

 

사카와: 도성의 등불이 켜졌어요!!

 

사카와: 분명 어호님께서 도움을 청하고 계시는 거예요!

 

키이: …….

 

키이: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지.

 

키이: , 우리도 등불을 밝힌다!

 

무사시 저택의 상공에 또 다른 등불이 떠올랐다.

 

잠시 후 이에 호응하듯 마을에서, 기지에서, 해상에서 차례차례 등불이 하늘로 떠올랐다.

 

등불이 이어진 모습은 마치 흐르는 은하수 같았다.

 

은하수는 천천히 대신목을 향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무츠: 나가토 언니…….

 

도성의 시들어버린 신목 밑에서 무츠는 묵묵히 기도했다.

 

넘치는 신앙이 중앵 곳곳의 신목에 깃들었다.

 

신목은 모두 대신목과 연결되어 있다. 신목은 모인 신앙을 모두 대신목에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따스한 손길처럼 말라 죽은 대신목의 뿌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활력을 불어넣었다.

 

무츠: 나가토 언니……….

 

무츠: 이러면 분명 나가토 언니의 힘이 될 거야.

 

무츠: 언니, 무사해야 돼――

 

 

 

 ~29. 긴 밤의 끝

칼날이 번쩍이며 앞을 가로막던 그림자가 일소되었다.

 

이부키: 여기는 이부키에게 맡겨주세요!

 

시만토: 이부키?

 

이부키: ! 수행을 하던 도중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이곳까지 왔습니다만

 

이부키: 갑자기 땅이 흔들리고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에 이상한 섬들이 떠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부키: 그래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이부키: 이부키 역시 중앵의 함선. 이런 상황을 두고볼 수는 없습니다.

 

이부키: 미력하나마 여러분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

 

허리춤에 손을 올리자 수많은 빛이 모여 칼의 형상을 이루었다.

 

몇 번이나 패배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칼은 아직 부러지지 않았다. 빛은 계속 모이고 있었다.

 

수십 자루의 빛나는 칼날이 운젠의 주위를 에워쌌다.

 

운젠: 조금 더 가까이.

 

운젠: 조금만 더 가까이――

 

스스로 되뇌며 그림자의 맹공을 피했다.

 

점점 그림자의 핵에 가까워지고 있다.

 

시만토와 이부키가 시종일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시야 바깥에 있는 그림자를 제거해주고 있을 터였다.

 

시만토: ……!

 

시만토: 운젠, 미안해. 우리는 여기까진가봐!

 

이부키: 역부족이라 죄송합니다!

 

이부키: 여기서부터는 운젠 씨에게 맡기겠습니다!

 

시키가미 용은 이미 불길에 휩싸였지만 여전히 온 힘을 다해 일행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부키: 이런칼날이……!

 

이부키는 이가 나간 칼을 힐끗 보고는 의연하게 적의 견제를 계속했다.

 

운젠: 거의 다 왔어요.

 

운젠: 거의 다…….

 

----

 

이부키: 운젠 씨…….

 

이부키: 뒤를 부탁합니다!

 

검은 기운이 이부키를 삼켰다.

 

운젠의 곁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부정의 그림자――어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마수는 마치 신인 것 마냥 다가오는 왜소한 존재를 내려다보았다.

 

전부 헛수고야――

 

운젠: 아닙니다.

 

전부 헛수고야――

 

운젠: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운젠: 저는 수많은 세계의 파멸을 목격했습니다.

 

운젠: 모든 운명 속에서 는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운젠: 저는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입니까?

 

운젠: 당신과 함께 소멸하는 것이 저의 숙명이라면.

 

운젠: 그것이 저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것입니까?

 

전부 헛수고야――

 

운젠: 저는 몇 번이고 잡념을 물리치고 인멸을 택했습니다.

 

운젠: 하지만 저는 틀렸습니다.

 

운젠: 미련, 망설임, 주저함.

 

운젠: ……그 분을 향한 마음. 다시 만나고 싶다는 염원.

 

운젠: 이 모든 감정이

 

운젠: 제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운젠: …….

 

운젠: 저는 결코 신이 아닙니다.

 

운젠: 그리고…….

 

운젠: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검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부정의 그림자는 하늘과 함께 둘로 갈라졌다.

 

검은 용은 몸을 뒤틀며 고통에 울부짖었다.

 

더는 형체를 이루지 못하는 검은 기운은 어딘가로 스멀스멀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반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주를 시도하고 있었다.

 

시만토: 운젠!

 

이부키: 시만토 씨!

 

시만토: 후후. 나는 괜찮아…….

 

운젠: 핵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형의 잔해에서 검붉은 빛을 발하는 어둠 덩어리가 튀어나와 함선들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이부키: 안 돼!

 

운젠: ! 따라잡기엔 늦었어요!

 

그 때 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개었다.

 

성역의 하늘, 봉인 바깥의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핵은 의식이 있는 것처럼 천장의 갈라진 틈으로 향했다.

 

운젠: 그렇다면!

 

의장을 소환해 포격을 가했지만 핵은 이미 사거리 바깥에 있었다.

 

이대로 재앙의 어둠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면――

 

나가토: 하아아압!!!

 

연분홍색으로 빛나는 문양이 핵의 앞을 가로막았다.

 

봉인의 결계는 곧 파문처럼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모든 어둠을 감싼 순간 봉인은 수축하여 대신목의 뿌리 쪽으로 향했다.

 

시간이 거슬러 올라가듯, 하늘에 떠 있던 땅덩어리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어둠은 다시 봉인되었다.

 

이부키: 나가토 님!

 

나가토: , 늦지 않았구나…….

 

나가토: 대현자. 봉인의 복구는 끝났다.

 

말을 마치자 나가토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도망치려던 핵은 순식간에 봉인 안으로 끌려들어가 더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부키: 나가토 님!!

 

이부키는 황급히 나가토를 부축했다.

 

이부키: 후우. 다행이다. 단순히 지쳐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시만토: 이 정도의 술식을 완벽하게 구사하다니.

 

시만토: 역시 중앵의 어호님이네.

 

시만토: 나도 아직 멀었는걸.

 

기진맥진한 시만토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운젠: 여러분과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운젠은 들고 있던 칼을 땅에 꽂았다. 칼날은 빛을 발하며 이윽고 바스러져 사라졌다.

 

운젠: 시간이 되었군요.

 

파랗게 빛나는 나비 한 마리, 백 마리, 천 마리가 운젠의 곁에 모여들었다.

 

그것은 빛의 띠가 되어 대신목 아래의 봉인을 향해 날아갔다.

 

멀리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흩날리는 연분홍 빗속에서, 대신목은 천천히 빛으로 화하고 있었다.

 

벚꽃 잎은 모여 강을 이루어 미지의 저편으로 날아갔다.

 

일행이 돌아보니, 그곳에 더는 운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30. 한때의 옛이야기

 

과거. 중앵 어느 곳.

 

기함 선출을 위한 특별 훈련. 그리고 카가와 아마기 자매의 사건도 무사히 끝났다.

 

무사시: 나가토 님의 상태는 어때?

 

키이: 무사히 대신목에 잠들었어. 별 문제는 없어 보여.

 

키이: 그런데 무사시 씨. 설마 대신목에 그런 기능이 있었을 줄은.

 

무사시: 이 일에 대해선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돼.

 

키이: ……알겠어.

 

키이: 그런데 나가토 님이 갑자기 기함에서 물러나신 건 대체 어떻게 기술해야 해?

 

키이: 부상으로 그런 거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무사시: 나가토 님께서 일찍이 분부하신 바가 있어.

 

무사시: 자신이 다치게 된 진상을 절대 알려서는 안 된다고.

 

무사시: 우리는 그저 나가토 님의 뜻대로 처리하면 돼.

 

키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에서 물러났다.

 

무사시는 몸을 돌렸다. 장막 뒤로 앉아 있는 작은 소녀의 그림자가 보였다.

 

미나즈키: “대현자가 부탁한 것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무사시: 이미 와타츠미의 모조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어. 완벽하지는 않지만…….

 

무사시: 하지만 그 특성은 이미 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야.

 

미나즈키: “그래. 시나노는?”

 

무사시: 약간의 성과는 있었어. 시나노는대현자의 꿈을 꾸는 힘을 일부 물려받은 것 같아.

 

무사시: 통제할 수 없어서 그런지 꿈과 현실의 인식이 모호해져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

 

미나즈키: “그렇다면 제사의 섬으로 옮기자. 중앵 본섬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앞으로 벌어질 풍파에서도 안전하겠지.”

 

미나즈키: “만약 시나노가 깨어난다면…… 그 때는 나를 대신하여 축복을 전해줘.”

 

무사시: 그래. 알겠어.

 

미나즈키: ……흐아암. 무사시 씨? 이제 끝났어?

 

미나즈키: 그럼 미나즈키, 가서 잘래…….

 

무사시: 그래. 이는 꼭 닦고 자려무나.

 

무사시: 푹 쉬렴. 미나즈키.

 

무사시: ……네 생각은, 대체…….

 

무사시: 야마토…….

 

 

 

 ~31. 한때의 풍경

차향이 코를 찔렀다. 따스한 햇살이 볼을 어루만졌다.

 

운젠은 천천히 눈을 떴다.

 

운젠: ……?

 

의식은 아직 혼란스럽고, 태양빛은 너무 강렬했다.

 

이부키: 운젠 씨. 안녕하세요.

 

옆에 있던 이부키가 몸을 받쳐 일으켜 세워주었다.

 

방 안은 중앵풍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부키: 목마르세요? 후후. 쑥차는 어떠신가요?

 

이부키는 옅은 김이 오르는 찻잔을 운젠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부키: 다시 인사드립니다. 저는 이부키입니다. 운젠 씨가 이곳으로 옮겨진 이후로 계속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기억의 단편이 차례로 이어졌다.

 

그 마지막 순간, 그녀는 나비가 되어 사라졌었다.

 

이부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운젠 씨.

 

이부키는 운젠의 손을 잡았다.

 

손끝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이 모든 것은 꿈이 아니다.

 

운젠: 이부키. 와타츠미…….

 

이부키는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듣기 좋은 새소리와 싱그러운 향기가 한순간에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창밖에는 낯익은 성역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연분홍색 수정으로 둘러싸인 호숫가에는 붉은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이부키: 그 때――

 

이부키: 호수 한가운데서 운젠 씨를 발견한 후부터, 그곳에는 대신목의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부키: 아마기 씨는 매일 확인하러 가신답니다. 후후.

 

운젠: 아마기? 그녀의 몸은 더는――

 

이부키: 그건아마기 씨에게 직접 여쭤보세요.

 

이부키: , 그래도 아직 회복한지 얼마 안 되셨으니 무리하시면 안 돼요?

 

이부키: 혹시 가볍게 산책하고 싶으시다면 옷을 준비할까요?

 

운젠: . 부탁드립니다.

 

이부키: 기꺼이요. 운젠 씨.

 

 

 

 ~32. ~망월초~ 손님

 

과거. 중앵. 나가토의 거처.

 

?년 전.

 

세계 해군사관학교의 방문은 아직 진행 중이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 땅과 바다의 풍토를 알아가는 것은 참으로 얻는 바가 많다.

 

다만 미래의 전장의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없다.

 

수첩을 펴고 앞으로의 예정을 확인해 봤다.

 

빽뺵이 들어찬 일정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앞으로 격무에 익숙해져야 할 몸이다. 이 정도로 꺾일 수는 없다.

 

그래도 뭐, 다음 일정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지금은 조금 쉬어도 되겠지.

 

요 며칠간 중앵 사람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

 

명소를 견학하거나, 각종 요리를 음미하거나…….

 

일을 하거나, 길고 지루한 회의를 하거나…….

 

나는 연설과 진행을 동시에 맡느라 집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이대로 있다간 기분까지 우울해질 것 같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33. ~망월초~ 정원

 

연회가 한창이다.

 

다들 화기애애하게 친목을 다지고 있었지만, 어쨰서인지 나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먼저 연회장을 떠났다.

 

----

 

달빛을 받으며 홀로 길을 걸었다.

 

시원한 산들바람을 맞으며 변두리에 있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목적 없이 길을 따라 걸었다.

 

모처럼 기분이 매우 좋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즐겼다.

 

……….

 

얼마나 걸었을까. 길목을 몇 개 지나자 눈앞에 아까와는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어두운 오솔길 끝에 보이는, 어느 한적한 정원.

 

건축물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설계가 돋보였다. 은은한 빛을 발하는 등불은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정말 편안한 곳이다.

 

몇 걸음 더 걷자,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연못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하얀 옷을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34. ~망월초~ 월하

어쩌면 내가 방해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서 사과해야.

 

???: 중앵의 요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지휘관: 저기…… 함부로 들어올 생각은 없었어. 나는 그냥 돌아다니다가.

 

???: 괜찮습니다. 이곳의 길은 상당히 복잡하니까요.

 

???: 하지만 당신은 결계를 뚫고, 모든 가능성을 뛰어넘어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 이것이 혹시 인연이라는 것일까요?

 

눈앞의 여성을 슬쩍 바라봤다.

 

???: 저도 그녀들과 같은지 생각하고 계십니까?

 

지휘관: 이런, 들켰나.

 

???: 괜찮습니다. 저는 오히려 당신에게서 특별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지휘관: 내가 보기엔 너도 특별한걸?

 

???: 그렇게느끼십니까?

 

그녀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스쳤다.

 

문득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잔잔한 물처럼 온화했다.

 

지휘관: …….

 

나는 먼저 고개를 돌렸다.

 

계속 쳐다보다가는 무언가 오해를 살 것 같았다.

 

지휘관: ……어흠.

 

지휘관: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굴 기다리기라도 하는 거야?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나는 화제를 돌렸다.

 

???: 아뇨. 조금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 생각?

 

지휘관: 만약 고민이라면나라도 괜찮으면 상담해줄까?

 

무심코 말을 꺼낸 것에 후회했다.

 

중앵 방문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오늘 밤 연회를 끝으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잠시 후면 나는 다음 목적지로 출발해야 한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지만 다음에 만나게 될 날은 언제가 될지 모른다.

 

지휘관: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다시 만나자.

 

???: 다음에…… 다시?

 

지휘관: 지금은 떠돌아다니는 몸이라서. 다음에 또 어디선가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

 

???: 인생은 무상한 것. 찰나는 영원과 같습니다.

 

지휘관: 하지만 지금 나는 이렇게 너를 만났어.

 

지휘관: 모든 가능성의 끝에서, 너를.

 

이번에는 그녀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잠시 달빛 아래 천천히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겼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리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발길을 돌린 순간,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나의 시선을 이끌어 하늘의 밝은 달을 가리켰다.

 

???: ………달이 아름답네요.

 

그녀의 아름답지만 덧없는 미소는 나의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졌다――

 

----

 

지휘관: …….

 

에식스: 지휘관님?

 

에식스: 지휘관님. 슬슬 도착합니다.

 

샹그릴라: 에식스? 왜 아직도 여기 있나요?

 

샹그릴라: 유니온 대표로서 리슐리외 추기경의 대관식에 참석해야 하니까 잘 준비해야죠.

 

샹그릴라: 새 옷을 준비했으니까 같이 갈아입으러 가요.

 

샹그릴라: 지휘관님도 얼른 채비를 마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말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지휘관: …….

 

지휘관: 어쩐지 그리운 추억에 잠겨 있었던 기분이야.

 

지휘관: 현재 위치는 유럽 대륙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곧 착륙하는 것 같다.

 

오늘의 업무 일정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지휘관: 당분간은 바쁜 날들이 이어지겠군.

 

잠깐의 휴식을 놓치기 싫어서 눈을 감았다.

 

그날 밤 만났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지휘관: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지휘관: 중앵의 대현자…….

 

 

 

    「그대는 이미 세계의 진실에 다가섰노라

    「옛 그림자는 이미 사라졌으나

    「본 그림자는 이미 도착했도다

    「나무는 고요하나 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그대는 어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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