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으로 그린 그림
~01. 그림에 깃들지 않은 영혼
모항. 집무실
업무에 집중하던 도중 시야 한구석에 무언가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마침 창틀 그늘에 숨어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라파엘로: ……!
그 사람은 초록색 머리를 흔들며 놀란 소동물처럼 재빨리 몸을 숙였다.
지휘관: ……라파엘로?
라파엘로: ……야옹~ 야옹~!
지휘관: 고양이 흉내내면 내가 속을 거 같아?
라파엘로: 에헤헤~ 들켜 버렸네~☆
그녀는 머리를 쑥 내밀며 당당하게 집무실로 들어왔다. 손에는 언제나처럼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지휘관: 오늘은 또 뭘 관찰하고 있었던 거야? 창가의 개미? 아니면 지나가는 새?
라파엘로: 아니아니아니. 여기 온 건 당연히 내 가장 소중한 영감의 원천을 관찰하기 위해서지~! 그런데…….
라파엘로는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표정도 살짝 굳어 있었다.
지휘관: 그런데?
그녀는 머뭇거리며 소파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쳤다.
라파엘로: 지휘관, 봐봐. 내가 최근에 그린 그림인데.
건네받은 스케치북의 모든 페이지에는 일할 때, 낮잠 잘 때, 식사할 때 등 다양한 순간의 내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지휘관: ……전부 나야?
라파엘로: 응! 요 며칠 동안 다양한 장소에서 지휘관을 관찰하면서 여러 각도에서 기록한 모습이야.
라파엘로: 집무실이나 식당, 심지어 모항을 산책하고 있을 때까지……. 그야 지휘관은 지금 내 가장 소중한 관찰 대상이니까♪
지휘관: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라파엘로: 흐흥~ 이건 관찰자로서 기본적인 소양이라구~ 하지만 문제도 바로 거기에 있어서 말야.
라파엘로는 스케치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라파엘로: 봐봐! 이건 지휘관이 문서를 수정하고 있을 때의 옆모습을 그린 건데, 선도 정확하고 음영도 완벽하지만…….
라파엘로: 본인이 가진 매력이 이 그림에선 전혀 느껴지지 않아……. 이래선 아무리 닮았어도 영혼이 없는 그림일 뿐이야~
지휘관: 겨우 그것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라파엘로: 당연하지! 나는 좀 더 '감정'이 담긴 지휘관을 그리고 싶어.
라파엘로: 표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지휘관이 집중하고 있을 때의 눈빛, 피곤할 때 살짝 처지는 속눈썹, 웃을 때의 입꼬리의 각도…….
라파엘로: 분명 느껴지는데 그려내질 못하겠어……. 표면 아래에 숨겨진 것들을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어…….
라파엘로: 어떡하지. 지휘관,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생각해줘~☆
지휘관: 화가가 아니라서 바로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데…….
라파엘로: 그림이라면 아직 많이 있으니까 같이 내 방으로 가서 볼래? 직접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지휘관: 지금 바로?
라파엘로: 당연하지♪ 지휘관도 슬슬 쉴 시간이잖아! 게다가 방에 있는 그림은 이 스케치북에 있는 것보다…… 훨씬 심각해서 말야…….
지휘관: 심각하다고?
라파엘로: 아무튼 가보면 알아~☆
라파엘로는 다짜고짜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02. 필요한 것
문을 연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몇 번을 봐도 충격적이었다――
책상과 바닥에 넘쳐나는 화구들은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지휘관: 역시 언제 와도…… 엄청난 광경이군.
라파엘로: 앗항~ 이게 바로 아티스트의 일상이라는 거야~☆
라파엘로는 스케치들을 꺼내어 하나씩 바닥에 펼쳐 놨다. 순식간에 방 전체가 도화지로 가득 찼다.
지휘관: 이것도…… 전부 나야?
라파엘로: 당연하지~♪ 다양한 각도와 조명 속에서 본 여러 상황 속의 지휘관이야!
이토록 많은 자신의 그림이 바닥에 가득 펼쳐져 있는 것은 분명 장관이긴 했지만…… 뭐라 말하기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휘관: 그래서 이 그림들의 어디가 심각하다는 거야?
라파엘로: 그러니까, 이것도 아까 보여준 그림처럼 기술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하지만…….
라파엘로: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그림 속의 지휘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쁠까? 조금 피곤할까?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돼.
라파엘로: 하지만 정답을 모르겠어……. 매일 너를 그리고 싶어서 매일 너를 관찰하고 있는데, 완성된 건 전부 어색한 것들뿐이야!
지휘관: ……….
아까부터 내 옆모습을 바라보던 라파엘로는 시무룩한 얼굴도 잠시,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라파엘로: 지휘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지휘관: 어?
라파엘로: 아까 나를 보며 미간을 찡그리고 한숨을 쉬었을 때, 부드러우면서도 약간 가슴 아픈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
라파엘로: 혹시 나 때문에 마음이 아픈 거야?
→ 나는……
지휘관: 나는……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 음……
지휘관: 음…… 맞아.
라파엘로: 그 표정이야! 그 표정에 감정이 잔뜩 담겨 있어!
라파엘로가 갑자기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젖혔다.
지휘관: 갑자기 왜 그래?
그녀는 늘 들고다니던 스케치북을 꺼내 빠르게 스케치하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라파엘로: 이 순간의 색조는 좀 더 따뜻하게 하는 게 좋겠어……. 방금 네 눈빛이 아주 포근한 호박색으로 빛나고 있었거든…….
지휘관: 영감이 떠오른 거야?
라파엘로: 으음…… 역시 아니야…….
라파엘로는 스케치북을 덮더니, 그대로 뒤로 훌쩍 쓰러져 바닥에 한가득 펼쳐진 그림 위에 누워 버렸다.
라파엘로: 그린 것과 느낀 것 사이에 괴리감이 있단 말이지.
라파엘로: 아까 지휘관이 내 쪽을 봤을 때, 분명 마음이 두근거렸어. 하지만 막상 그리려고 하니까 그냥 단순한 이모티콘 같은 거만 남았어.
지휘관: 그러니까 문제는 그림이 닮지 않았다, 가 아니란 거지?
라파엘로: 으음……. 중요한 건 방금 같은 '쿵 하는 느낌'을 어떻게 그림으로 담아내느냐인데…….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따금 창밖의 바람이 도화지를 흔들며 바스락 소리를 냈다.
라파엘로: 맞아……! 알아냈어! 역시 난 천재야~☆
라파엘로는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벌떡 일어났다.
라파엘로: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던 건 그동안 계속 관찰만 해서였어! 지휘관과 함께 있는 느낌이 어떤 건지 몰랐던 거야!
라파엘로: 이 '쿵 하는 느낌'을 느끼게 해 주는 지휘관과……
라파엘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그 감정을 잔뜩 느끼다 보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지휘관: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뭘 하겠다고?
라파엘로: 지금부터 지휘관이랑 같이 놀러 나가서, 함께 있는 느낌을 체험해 볼래♪ 그 '쿵 하는 느낌'이 넘쳐흐를 정도로 말야♪
라파엘로: 아까 도와준다고 그랬지?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
라파엘로는 내 손을 꽉 움켜쥐고는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
~03. 혹시 간접 키스?
라파엘로는 나를 데리고 모항 상점가 골목 안쪽에 있는 작은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
그곳에는 금박이 뿌려진 초콜릿, 장미 모양 컵케이크, 팔레트 위에 '물감'을 표현한 듯한 창작 디저트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라파엘로: 짜잔~! 여기가 바로 내 비밀기지 중 하나인 '디저트 갤러리'야~☆
지휘관: 디저트?
라파엘로: 아니 아니, '먹을 수 있는 예술품'이라구! 이거 봐――
라파엘로는 진열장에 있는 팔레트 모양의 케이크를 가리켰다.
라파엘로: 하얀 부분은 크림치즈, 빨간 부분은 딸기잼, 보라색은 블루베리잼, 노란색은 망고…….
라파엘로: '물감'마다 다 맛이 달라! 그야말로 입에 쏙 들어가는 팔레트지!
지휘관: 여기로 데려온 이유를 대충은 알 것 같네…….
라파엘로: 응응! 그 '쿵 하는 느낌'을 느끼려면 우선 지휘관을 내가 좋아하는 장소로 데려와야지~
케이크를 맛보는 라파엘로의 모습은 햇살 덕분에 눈부시게 빛나 보였다.
라파엘로: ……이거, 평소에도 먹던 디저트인데 왜 오늘따라 유독 맛있고 유독 예뻐 보일까?
지휘관: 응?
라파엘로는 파란색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태양을 향해 비춰 봤다.
라파엘로: 이 파란색도 오늘 하늘이랑 엄청 닮지 않았어? 무척이나 아름다운 파란색인데, 살짝 우윳빛이 투영되어서…….
라파엘로: 파란색은 차가운 색인데도 엄청 따뜻하게 느껴져…….
지휘관: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라파엘로: 아니 아니! 너랑 함께 있으니까 따뜻하게 느껴지는 거야!
라파엘로: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해. 그 '쿵 하는 느낌'이 아직 안 왔단 말야……. 으으음~ 대체 어떻게 하면 될까……?
지휘관: 그래서……?
라파엘로: 아~ 하고 먹여줘~☆
라파엘로의 당당한 요구에 어쩔 수 없지 파란색 케이크를 먹여줬다.
그녀는 케이크를 한 입에 쏙 삼키고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천천히 음미했다. 그리고 이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라파엘로: 으음~ 맛있다~! 계속 그림만 그렸더니 마침 배가 고팠거든!
지휘관: 천천히 먹어.
그녀가 다 먹은 것을 보고 다른 케이크를 집으려 하자, 라파엘로는 갑자기 포크를 빼앗아 들더니 내게 케이크를 내밀었다.
라파엘로: 나만 먹을 게 아니라 지휘관도 제대로 먹어야지~ 자, 아~~
지휘관: ……아~
기대로 가득 찬 눈빛을 보며 나는 어쩔 수 없이 얌전히 케이크를 받아먹기로 했다.
라파엘로: 어때?
지휘관: 음…… 달콤하고 맛있네.
라파엘로: 에헤헤~♪
라파엘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이번에는 빨간색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라파엘로: 으음~ 이 맛이야! 지휘관도 먹어 봐!
라파엘로: 엄청 맛있다구! 지휘관, 빨리빨리! 아~
순수하고 무해한 미소를 앞에 두고 나는 도저히 거절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지휘관: 음…… 확실히… 맛있네, 이거.
라파엘로: 그치 그치~♪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다가 갑자기 볼을 붉히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손가락 틈새로 나를 흘끔거렸다.
지휘관: 왜 그래? 이제 와서 부끄러워진 거야?
라파엘로: 으으으――! 방금 또 마음이 쿵 했어! 엄청 강하게!
지휘관: 더 먹을래?
라파엘로: 응…… 역시 내가 아~ 하고 먹여 줄게…. 지금 이 기분을 조금 더 느끼고 싶어…!
라파엘로는 케이크를 살며시 내 입가에 내밀었다. 투명한 잼이 그녀의 눈가에 따스한 색을 입혔다.
~04. 평범하지 않은 풍경
우리는 번갈아 가며 서로 케이크를 먹여줬다. 볼을 붉히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우리 둘 다 멈추려 하지 않았다.
라파엘로: 아~…… 이걸로 끝.
지휘관: 다 먹었네.
라파엘로: 지휘관…….
지휘관: 응?
라파엘로: 그리고 싶어.
지휘관: 뭘?
라파엘로: 이 케이크를…… 라기보단 우리가 먹어버린 케이크를 그리고 싶어!
라파엘로는 재빨리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지만, 바로 손을 움직이지 않고 텅 빈 접시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라파엘로: 이상하네…….
지휘관: 뭐가?
라파엘로: 지금까지 그림을 그릴 때는 항상 '올바른 구도'나 '정확한 명암', '투시에 신경 쓰기' 같은 것들을 생각했는데…….
라파엘로: 지금은 머릿속이 아까 지휘관이 나한테 아~ 해 주던 모습이랑, 내가 지휘관에게 아~ 해 주던 모습으로 가득 차서…….
라파엘로는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억을 음미하며 그리는 것인지,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느린 손길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연필을 내려놓더니 스케치북을 내게 내밀었다.
라파엘로: 자!
스케치북에는 텅 빈 접시와 흘러내린 자잘한 케이크 부스러기가 그려져 있었다.
보고 있자니 조금 전 내리쬐던 햇살과 케이크의 향기,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서로에게 먹여주던 장면이 아른거렸다.
지휘관: 따뜻해.
라파엘로: 정말?
지휘관: 응. 접시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누군가 그걸 맛있게 먹었다는 게 고스란히 전해져.
라파엘로: 드디어 감정을 아주 조금이나마 담아냈다는 뜻이네. 테크닉이 아니라, 그냥…… '쿵 하는 느낌'.
지휘관: 그럼 이걸로 성공인 건가?
라파엘로: 음…… 절반 정도?
지휘관: 절반?
라파엘로: 감정이 느껴지는 접시를 그릴 수 있었던 건, 지휘관과 실제로 '케이크를 먹는 일'을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라파엘로: 하지만 널 그리려면 아직 한참 부족해.
지휘관: 그럼 어떡해?
라파엘로: 계속 데이트를 더 해야지~♪
라파엘로: 체험이라는 건 상호적인 거라구~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완벽한 지휘관을 그릴 수 없어!
지휘관: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은걸.
라파엘로: 에헤헤, 그야 대작을 그리는 거니까~☆
라파엘로: 그럼 더 '쿵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서 렛츠고~☆
~05. 쿵을 찾아서 GO!
라파엘로에게 이끌려 상점가, 해안, 숙소를 거쳐 마침내 도서관에 도착했다.
라파엘로: 여기는 어때?
지휘관: 도서관?
라파엘로: 응! 이 각도에서 봐봐. 높은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와서 공간 전체가 빛으로 가득 차 있어.
지휘관: 예쁘긴 하네.
라파엘로: 지휘관, 거기서 움직이면 안 돼~
라파엘로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양손으로 카메라 프레임 모양을 만들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라파엘로: 으음…. 지휘관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어?
지휘관: 앞으로 몇 분이나 더 이렇게 서 있어야 되나, 그런 생각.
라파엘로: 안 돼 안 돼! 그 대답은 너무 '지휘관'스럽잖아.
지휘관: 그럼 어떤 대답을 원했던 건데?
라파엘로: 글쎄. 예를 들면…… '이 아름다운 빛 속에서, 너를 생각하고 있었어' 같은 거?
지휘관: 그건 너무 가식적이지 않아?
라파엘로: 에이, 가식적이라니? 하지만 난 정말로 온통 네 생각뿐인걸?
지휘관: ………….
라파엘로: ……오! 지휘관…… 방금 '쿵' 했어?
→ 쿵 했어
지휘관: 쿵 했어.
라파엘로: 정말? 하지만 그 '쿵'은 내 말 때문에 생겨난 거니까, 이 장소하고는 무관하네.
→ 딱히……
지휘관: 딱히…….
라파엘로: 거짓말~♪ 실은 쿵 했으면서. 괜찮아. 그 '쿵'은 내 말 때문이지, 이 장소와는 무관하니까.
라파엘로: 그러니까…… 다음 장소로 가자!
라파엘로와 모항 곳곳을 돌아다녔다. 해변에서는 그녀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파도로 뛰어들게 되었다. 차가워서 깜짝 놀란 내 모습을 보며 라파엘로는 소리 내어 웃었다.
공원에서는 작은 꽃 한 송이를 꺾어 내 깃에 달아주더니, 그 즉흥적인 작품을 가만히 감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데이트는 별이 얼굴을 드러내고 사방이 조용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라파엘로: 지휘관, 많이 돌아다녔는데 안 피곤해?
지휘관: 아직 괜찮아.
라파엘로: 재밌었어?
지휘관: 응.
라파엘로: '쿵 하는 느낌'도…… 더 늘어났어?
지휘관: 늘어났어.
라파엘로: 다행이다♪ 오늘은 정말 넘쳐흐를 정도로 많은 감정을 느꼈어~
라파엘로: 그래도 아쉬워……. 많은 장소를 돌면서 다양한 순간을 경험했는데도, 너를 당장 그리고 싶어! 같은 느낌은 딱히 오지 않았거든….
지휘관: 왜?
라파엘로: 아마도…… 내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라파엘로: 너를 바닷속으로 이끌거나, 작은 꽃을 달아줬던 광경은…… 전부 아름답지만, 막상 그리려고 하면 내가 화면에 있지 않고서는 성립하지 않는 기분이 들어!
라파엘로: 내가 있으면 그려지는 건 '우리들'이 되잖아? 내가 그리고 싶은 건 언제나 '너 하나'뿐인걸~
지휘관: 그러니까…… 라파엘로의 개입이 없는 상황이 필요하다는 거네?
라파엘로: 그렇게 말하면 내가 꼭 방해꾼이 된 거 같잖아!
지휘관: 그렇지 않아?
라파엘로: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이건 어디까지나 사랑의 방해니까!
라파엘로: 뭐, 네 말대로 내가 그리고 싶은 건 내 존재나 행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지휘관이야.
지휘관: 그럼…… 돌아갈까.
라파엘로: 어디로?
지휘관: 집무실. 거기라면 '라파엘로가 없는 지휘관'의 모습이 있을 테니까.
라파엘로: 응♪
우리는 손을 꼭 맞잡고 따스한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길을 걸어갔다.
~06.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향해
집무실 문을 열자 늘 보던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라파엘로: 드디어 본거지로 돌아왔네~♪
지휘관: 여기서 그림 그릴 거야?
라파엘로: 응!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면서 생각한 건데, 역시 여기가 가장 '지휘관'이라는 느낌이 든단 말이지!
능숙한 손놀림으로 화구를 준비하고 물감을 섞던 라파엘로는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라파엘로: ……지휘관.
라파엘로: 왜 그렇게 꼿꼿하게 앉아 있어?
지휘관: 어? 나보고 모델 해 달라는 거 아니었어?
라파엘로: 모델이 되어 달라는 건 맞지만…… 그 자세는 사진이나 조각상 같아서 전혀 너답지 않아!
지휘관: 그럼 어떻게 앉아 있으면 돼?
라파엘로: 음… 평소처럼? 응, 늘 앉아 있던 느낌으로 부탁해!
지휘관: 늘 앉아 있는 느낌? 평소에는…… 앉아서 서류를 처리하니까…….
라파엘로: 그럼 서류를 보고 있어줘!
지휘관: 하지만 지금은 처리해야 할 서류가 없는데…….
라파엘로는 다른 책상에 쌓여 있던 서류 더미에서 대량의 서류를 한 움큼 집어 들더니, 내 앞에 내려놓았다.
라파엘로: 지휘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서류라면 여기 잔뜩 있잖아?
지휘관: 이건 내일 처리할 서류…….
라파엘로: 오늘 분이야! 이건 오늘 분이라구!
지휘관: 진심이야…?
라파엘로: 당연하지♪ 나는 여기 없다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말고 일에만 집중해.
지휘관: 알겠어.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웃으며 맨 위에 있는 서류를 펼쳐 들고 검토하기 시작했다.
지휘관: 이러면 됐어?
라파엘로: 아, 움직이지 마! 응, 그거! 나는 그냥 공기라고 생각해!
지휘관: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데…….
라파엘로: 그럼 벽에 걸린 초상화라고 생각하면 어때? 아니면 숨 쉬는 조명?
지휘관: 숨 쉬는 조명이라는 게 있어?
라파엘로: 지금 여기 있잖아♪
자신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던 라파엘로는 이내 한 걸음 다가와 내 눈을 지긋이 바라봤다.
라파엘로: 지휘관, 긴장했어?
지휘관: 조금.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살며시 누르자,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라파엘로: 긴장 풀어~ 내가 곁에 있잖아.
라파엘로는 갑자기 펜을 빼앗아 들더니 내 손등에 한 획 한 획……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라파엘로: 이렇게 하면 너만의 그림이 아니라, 우리 둘만의 그림이 되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캔버스 앞으로 돌아갔다. 집무실 안에는 서류를 넘기는 소리와, 붓이 캔버스 위를 달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나는 가끔씩 고개를 들어 손등을 바라봤다. 잉크로 새겨진 라파엘로의 이름에는 마치 무언의 약속이 감춰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07. 마음 가는 대로
지휘관: 후우…… 겨우 다 끝났다.
나는 펜을 내려놨다. 일을 다 마쳤다는 상쾌함에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흘렸다.
지휘관: 오늘은 꽤 효율적이었어.
어느새 일에 완전히 몰두해 버렸지만, 문득 라파엘로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지휘관: 라파엘로?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조금 전과 똑같은 자세 그대로 캔버스 위에 붓을 계속 칠하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라파엘로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는 것을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지휘관: 라파엘로?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라파엘로는 오직 눈앞의 캔버스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등 뒤에서 캔버스를 슬쩍 훔쳐봤다. 그리고 그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에 있는 것은 미간을 찌푸린 채 서류를 마주하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진지한 눈빛으로 힘차게 펜을 움직이던 바로 그 순간의 모습이었다.
평소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던 디테일들이 캔버스 위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지휘관: 이게…… 나?
라파엘로: 앗, 지휘관!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지휘관: 라파엘로가 너무 집중해서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을 안 하길래.
라파엘로: 그야 어쩔 수 없지~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단 말야!
라파엘로는 내가 더 잘 볼 수 있도록 캔버스를 옆으로 살짝 밀었다.
라파엘로: 어때? 소감 한 번?
지휘관: ……평소의 나는 이런 느낌이야?
라파엘로: 응~♪ 혹시 모르고 있었어? 네가 일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멋진데♪
지휘관: 정말 관찰력이 좋구나.
라파엘로: 당연하지~♪ 이래봬도 난 프로 관찰자니까! 그거 말고 다른 소감은?
지휘관: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할까……. 그림 속의 나는 진지한 표정이고, 조명이 밝은 것도 아닌데다 배경마저 평범한 집무실인데…….
지휘관: 보고 있으면 조금 전 일할 때의 기분이 고스란히 떠올라.
라파엘로: 그건 어떤 기분이야?
지휘관: 누군가를 신경 쓰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누군가가 나를 신경 써 주고 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
라파엘로: ……들켜 버렸네.
지휘관: 응?
라파엘로: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오늘 경험했던 '쿵'하는 많은 순간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거든.
라파엘로: 장소가 어디든…… 그 마음은 똑같아. 그러니까 그걸 그대로 그림에 담아내면 되는 거였어.
라파엘로는 물감이 조금 묻은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라파엘로: 지휘관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지휘관: 나도 그래.
우리는 조용히 그림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누군가가 진심 어린 다정한 눈빛으로, 정성껏 보살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라파엘로: 아, 맞다!
지휘관: 왜 그래?
라파엘로: 아직 '일하고 있는 지휘관'밖에 안 그렸잖아! 더 많이 그리고 싶어!
지휘관: 더 많이?
라파엘로: 응! 밥먹는 지휘관, 산책하는 지휘관, 나 때문에 웃음이 터진 지휘관, 그리고…… 계속 나만 바라보는 지휘관!
지휘관: 앞으로 몇 장을 더 그려야 만족할 건데…?
라파엘로: 만족이라니 당치도 않지~♪ 많이 많이 그려서 너의 다양한 모습을 전부 담아내 줄게♪
지휘관: 초상권 이용료라도 받아야겠는걸.
라파엘로: 에엑~! 그림으로 지불해도 돼?
지휘관: 내 그림으로 값을 때우겠다는 거야?
라파엘로: 음…… 생각해 보니 그건 좀 이상하긴 하네~♪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난 앞으로도 계속 그림을 그릴 거니까!
라파엘로는 손을 놓고 다시 캔버스 앞으로 돌아가 붓을 들고 그림을 다듬기 시작했다.
라파엘로: 휴식 시간 끝! 계속 그릴 거야~!
지휘관: 그래. 만족할 때까지 있어 줄게.
달빛이 집무실을 은은하게 비추는 가운데, 캔버스를 달리는 붓 소리와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이 밤의 가장 부드러운 멜로디를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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