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탄생
나는 투명(Klarheit).
허무로부터 생을 받아 깨어난 철혈의 허상.
이 세계의 부름을 받아, 문명의 등불을 지키기 위해 건조된, 올바른 힘의 사용자.
모항. 집무실.
나와 같은 동형함이자 인형의 생명체라고 인식한 존재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집무실」에 들어가 착임 인사를 하려고 한다…….
그 세계에서 얻은 기초지식을 활용하여 최적의 응답을 발음기관을 통해 내뱉는다.
Z46: 나를 부른 건 그대인가?
개체명 식별. 계급 확인. 방금 전 들었던 기본정보와 대조. 일치 확인.
Z46: 나는…….
……밝힐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전 친절하게 설명해준 철혈의 아이. 퓐이라는 이름이었던가….
Z46: 분하지만, 부를 이름이 없는 나를, 잠시간 Z46(피제)라고 불러줘.
「이름은 본질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임기응변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를 정의내린 것은 악수일지도 모른다.
급하게 생각한 호칭이 적절한지 어떤지, 문득 자신이 없어졌다.
Z46: 어떤가. 이 호칭은 적합한가?
……단번에 받아들여졌다.
애초부터 용골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몸. 명령받은 것만 수행하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 그렇다면…….
Z46: 진짜 이름을 발견할 때까지 이 이름이 나를 매어두는 실이 될지어다.
Z46: 자, 나의 주인 되는 자여. 실을 당기어서,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을 나타내 보아라!
적어도 이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만이라도, 투명한 나에게 세계의 빛을 보여줘.
~02. 궤적
나는 원색(Grundfarbe).
일시적인 이름을 빌려, 존재의의를 추구하는 마음을 가진 인형.
지금은 모항 집무실에서, 이 함대를 통괄하는 존재.
「지휘관」을 보좌하여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모항. 집무실.
Z46: 이 자료는 여기에 두면 되겠나. …흠. 그러면 명령대로 대응하지.
Z46: ……그나저나 인간은 역시 흥미로워. 고작 병기를 운용하는 것뿐인데 이렇게나 많은 서류가 필요할 줄이야.
Z46: 연료의 조달과 집적. 탄약의 원료 확보. 식량 보급. 비품의 구매와 폐기. 병기의 장비 뿐 아니라 생활 전반까지. 참으로 번잡하구나.
Z46: 그렇기에 더욱, 정리가 효과적이겠지. 이렇게 비서함의 집무를 하고 있으면, 함대를 움직이는 것은 바로 나라고, 무심코 들뜨고 말아.
아직 모르는 것이 많지만, 전투만 나가던 때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비서함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무언가 다르다.
적을 쓰러트리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쓰러트리지 않을 수 있을까」 궁리하는 것.
그리고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
Z46: 지휘관. 보고서를 제출하마. 받아줘.
Z46: 철혈 기숙사의 이번 달 회계장부, 정서와 정리. 아슬아슬하게 완료.
Z46: 절약은 중요하지. 구축함이라면 몰라도 중순을 설득하는 것은 꽤나 힘들었다. 전함은 애초부터 대식을 하니 억제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다.
톡톡.
Z46: 칭찬해주는 건 상관없다만 옷을 넘어서 피부를 만지는 것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군.
Z46: 급료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접촉은 무엇을 초래하는 것인가.
전에는 「칭찬하다」라는 행위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조금 진보했다. 이것이 모두가 말하는 「진보」라는 것이라면…….
이러한 「스킨십」은 아직 이해하기 어렵다. 「알고 싶다」라는 마음의 물결은, 전투 중 파도가 밀려오면 이리도 쉽게 지워져버리고 마니까.
다음엔 더 솔직하게 물어보자.
~03. 막간Ⅰ
모항. 기숙사.
Z46: 이거면 괜찮나? 옷 고르기는 익숙하지 않은 고로 기탄 없이 의견을 들려줬으면 해.
Z20: 이건 좀……. 니미 흉내 내는 것도 아니고, 피제는 좀 더 차려입는 쪽 어울린다구~.
Z21: 그러네……. 성실하니까 어떻게 해도 수수한 차림새가 될 것 같으니 아예 퓐 같은 애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아?
Z19: 나는 이 옷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Z20: 쾬느는 니미하고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니까 아웃.
Z19: 뭐어어어!?
Z21: 퓐이나 레베는 너무 화려하게 입으니까 한스 같은 애한테 부탁하면 어떨까?
Z46: ………….
Z20: 한스는 뭘 골라도 좋다고 할 것 같으니까 아웃. 아! 젝이라면 괜찮을지도!
Z19: 젝은 언제나 퓐한테 옷 골라달라고 하지 않아…?
Z21: 그럼 젝도 무리겠네…. 결국 피제의 옷은 여기 있는 세 명이서 정해야 할 것 같아….
Z46: ………….
Z20: 아! 미안! 피제! 우리만 계속 얘기해서><
Z21: 어어, 아무튼 이 옷은 어딜 봐도 겨울에 입는 옷이니까. 여름옷은… 으음, 이거하고 이거. 살이 타지 않도록 가디건도 하나 걸치는 건 어때?
Z46: 알겠어. 그렇게 하지.
Z19: 정말. 다들 피제 의견은 듣지도 않고 각자 말하고 있잖아……. 피제. 네가 좋아하는 옷을 골라도 돼.
Z46: 배려에 감사한다. 그렇게 하지.
미묘하게 대화에 끼기 힘들었던 건 어째서일까.
~04. 사색
나는 혼색(Mischfarbe).
각자의 생각이 한데 섞여, 사회라는 렌즈를 통해 반사되는 정채로운 도영.
지금은 지휘관이 맡긴 어떤 물건을 들고,
부두에 있는 영원한 그녀에게 전하러 가는 임무를 맡고 있다.
모항. 부두.
Z46: 티르피츠. 지휘관이 맡긴 물건을 전하러 왔다.
티르피츠: 피제? 고마워. 확실히 받았어.
소포를 영원한 그녀, 「고독한 북방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지는 전함·티르피츠에게 건넸다.
티르피츠: 피제는 비서함 근무 중인가? 지금부터는 뭘 할 거지?
Z46: 딱히 예정은 없는 고로 기숙사로 돌아가는 것, 이 다음 예정이다.
티르피츠: 그래? 만약 괜찮다면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다른 애들보단 피제에게 말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Z46: 상관없다. 들어주는 것 뿐이지만 그것으로 족하다면 함께 해주지.
티르피츠: 그래. 그저 혼잣말이라고 여겨도 충분해.
그 이야기는 즐거웠다. 다른 진영과의 교류. 덜 성숙한 함들의 현재 모습. 그리고 전함들의 모임에서 휘둘리는 티르피츠 자신…….
그 이야기는 가탄스러웠다…. 그 세계에서의 철혈의 최후. 경면해역에 있었던 「또 다른 자신」. 끝나지 않는 싸움에 몸을 던진 동료의, 너무나도 불확실한 미래…….
가끔씩 맞장구를 치고, 시선을 맞추고, 소소한 말로 공감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티르피츠: 피제는 장래에 무얼 하고 싶지?
Z46: 나 말인가? 나는…….
갑작스런 질문. 긴 침묵.
나의 빛깔은…… 뭐지?
~05. 막간Ⅱ
모항. 학원.
그라프체펠린: 이 소시지, 여느 때보다 한층 더 맛있군.
Z46: 그라프도 모항에 온 뒤로 자우어크라우트 만드는 실력이 꽤나 좋아졌구나.
그라프체펠린: 우리들이 의장을 길들이는 데에는 손이 많이 가지. 타 진영과 공존한다고 하면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피제의 협력에는 감사를 표하는 바야.
Z46: 신경 쓸 것 없다. 나는 그라프가 소중한 친우이기 때문에 도운 것 뿐이다. 당연한 일이지.
그라프체펠린: 친우, 라……. 후후. 구축함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허나 피제의 말이라면 이상하게도 납득이 가는군.
Z46: 그리고 감사를 받을만한 일도 아니야. 같은 철혈함 동지로서 서로 돕지 않으면 무엇 하리.
그라프체펠린: 그렇다면 나도 조언 하나 하지. 피제. 그 말투, 그만둘 수는 없겠나?
Z46: 그라프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다만. 아무튼, 근거는 뭐지?
그라프체펠린: 피제는 구축함 무리에 좀처럼 끼어들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지? 그렇다면 조금만이라고 흉내를 내보는 건 어떤가?
그라프체펠린: ……다른 아이들과 같은 말투, 라는 것을.
Z46: ………….
그라프체펠린: 피제?
Z46: 조금, 노력해볼…… 게.
그라프체펠린: 흥. 그리하도록. 나도 응원하마.
Z46: ……응. ……도시락, 다음에도 나눠 먹…… 자?
그라프체펠린: 아아. 물론이다.
그녀가 만든 도시락. 자우어크라우트의 도리아에 스푼을 밀어 넣고, 그리고 입으로 옮겼다.
~06. 굴레
출격을 마쳤다.
양산형 적함 수십 척. 「장기말」 수 조각. 중규모 함대였지만, 탄약이 바닥난 아군에게 있어서 이미 그것은 강적이었다.
나는 싸웠다.
주포 포격 횟수 수십 번. 포신이 과열될 때까지 포탄을 쏘았다. 아무튼, 만신창이였다.
의장도, 임시로 몸에 걸치고 있는 천 조각도……. 빛을 잃고 초연에 휩싸여 잿빛으로 물들어 간다.
모항. 집무실.
Z46: 방금 전 전투의 보고서……. 확인하는 것을 잊지 말도록.
……어째서, 그렇게까지 싸웠나.
Z46: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최대한 노력했다. 적도 자아가 있다면 필시 의기양양했겠지.
……어째서, 후퇴하지 않았나.
Z46: 얻을 수 있는 전과는 가급적 손에 넣으려고 했다. 실제로, 후퇴했을 경우에 비하면 적에게 입힌 손해가 훨씬 컸을 거야.
……어째서,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나.
Z46: 비록 비서함 근무를 맡고 있지만, 나는 병기다. 그저 싸우기 위한 존재에 불과해.
Z46: 「피제」라는 존재이기에 앞서, 그 대전에서 설계되었고 기대를 받았던 「Z46」이다.
마음속에서 외치고 있다. 아니라고 한다면, 나에게 의미를 부여해줘.
병기가 아닌, 당신이 바라는 나에게 싸울 이유를 알려줘.
사랑하는 그대의 곁에 있는 나에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줘.
나에게 빛을, 주세요.
~07. 순백
「그렇지 않아」 병기로서 부정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잿빛이 아니야.
「피제는 마음도 소원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자아가 없는 순수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투명하지도 않아.
「피제, 네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 일시적인 이름을 소유하고 있을 뿐인 존재는, 소중하게 여길 「나」를, 분명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묻노라.
Z46: 사랑하는 자여. 나는 대체 어떤 빛깔이지?
Z46: 부디 알려줘. 그대는 대체, 어떤 「나」를 바라고 있는 거지?
Z46: 그대가 바라고 원하는 존재로, 나는 변하도록 하마.
……「피제는, 피제 그대로 있으면 돼」
답은 주어졌다.
Z46: 그렇다면, 나는 하양(Weiß).
Z46: 그대의 빛으로 물들기 위해, 투명한 자신을 하얗게 물들여가는 어리석은 자일지어나……,
Z46: 아무리 초연에 더럽혀져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음속의 잿빛을 씻어내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 맹세로, 눈앞에 있는 「지휘관」에게 지금, 내게 가능한 모든 것을 바치노라.
말을, 포옹을, 입맞춤을. 모든 축복을.
Z46: 바라건대, 순백의 나는 그대가 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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